고대사

알레시아 전투: 카이사르의 승리와 갈리아의 항복

베르킨게토릭스, 알레시아로 향하다

모든 기병이 달아나는 것을 본 베르킨게토릭스는 진영 앞에 도열해 있던 병력을 불러들였고, 급히 짐을 챙겨 만두비족의 도시인 알레시아로 향했다. 카이사르는 짐짝을 인근 언덕에 두고 두 개 군단으로 지키게 한 뒤, 날이 저물 때까지 적을 추격해 후위병 약 3,000명을 베어 넘기고 이튿날 알레시아 앞에 진을 쳤다. 도시의 지형을 정찰하고 기병대 패배로 적들이 공포에 질린 것을 본 카이사르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포위 공성선(환상선) 구축을 시작했다.

알레시아의 지형과 양군 배치

이곳은 산꼭대기에 자리해 매우 높아 정식 공성전 외에는 함락이 불가능해 보였다. 산기슭 양쪽에서 두 강이 흘렀고, 도시 앞에는 길이 3,000보 정도의 평야가 펼쳐져 있었으며, 나머지 면은 비슷비슷한 높이의 언덕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성벽 아래 해가 뜨는 쪽에는 갈리아 병력이 참호와 높이 6피트의 토성(흙벽)을 앞세우고 진을 치고 있었다. 로마군의 환상선 둘레는 11,000보에 달했다. 진영은 유리한 지점에 설치되었고, 23개의 보루가 세워져 낮에는 경비병을, 밤에는 파수병과 든든한 수비대를 배치했다.

갈리아 기병대의 패배

공사 중 언덕이 섞인 3,000보 너비의 평야에서 기병전이 벌어졌다. 양측의 완강함은 대단했다. 아군 기병이 밀리자 카이사르는 게르만 기병을 지원군으로 보냈고, 만일의 보병 돌격에 대비해 군단을 진영 앞에 배치했다. 군단의 지원을 본 아군 기병의 사기가 올랐고, 갈리아 기병은 도망치다 좁은 문에 몰려 서로 엉켰다. 게르만 기병이 진영까지 맹추격해 대살육이 벌어졌다. 일부는 말을 버리고 참호를 건너 토성을 오르려 했다. 카이사르가 진영 앞 군단을 전진시키자, 토성 뒤 갈리아인들까지 우리가 덮치는 줄 알고 공포에 질려 무기를 외치며 도시로 달아났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진영이 완전히 버려질까 봐 성문을 닫아걸었다. 게르만 기병은 많은 적을 죽이고 수많은 말을 노획한 뒤에야 철수했다.

베르킨게토릭스, 기병을 돌려보내고 구원 요청

로마의 환상선이 완성되기 전, 베르킨게토릭스는 야간에 모든 기병을 내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떠나는 기병들에게 "각자 고장으로 돌아가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이를 소집하라. 내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라. 공동의 자유를 위해 공을 세운 나를 잔인한 적의 손아귀에서 구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8만 정예병이 나랑 함께 멸망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식량은 아껴 쓰면 30일 정도, 더 버틸 수 있다고 했다. 이 당부 후 2경(밤 9시~11시)에 아직 틈이 남은 포위망 사이로 기병들을 조용히 내보냈다. 그는 시내 곡식을 모두 징수하고 불복종자는 사형에 처했으며, 만두비족이 모아둔 가축은 인원수대로 분배하고 곡식은 조금씩 계량해 지급했다. 성벽 밖 병력까지 시내로 불러들여 구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태세를 갖췄다.

알레시아 주변 카이사르의 요새 공사

투항자와 포로들을 통해 이 사실을 안 카이사르는 다음과 같은 요새 계획을 세웠다. 먼저 폭 20피트, 깊이 20피트의 수직 참호를 팠다. 나머지 공성 시설은 이 참호 뒤 400피트 지점에 구축했는데, 포위망이 너무 넓어 병력이 모든 지점을 다 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야간 기습과 주간 공사 방해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이 공간에 폭 15피트, 깊이 15피트 참호 두 개를 더 팠는데, 안쪽 낮은 지대 참호에는 강물을 끌어들여 채웠다. 그 뒤에 높이 12피트의 토루와 성벽을 쌓고, 여첩과 보루를 얹었으며, 성벽과 토루 이음새에 큰 갈고리목을 박아 적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 전체 공사선은 80피트 간격의 망루로 측면 엄호했다.

동시에 목재와 식량 조달, 원거리 근무자를 뺀 병력을 총동원해 대공사를 진행했다. 갈리아군은 수시로 공사장을 방해하며 여러 문으로 격렬하게 출격했다. 카이사르는 더 적은 병력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시설을 보강했다. 나무 줄기와 굵은 가지를 껍질 벗겨 끝을 뾰족하게 다듬어, 깊이 5피트 참호에 발이 묶이지 않게 박아 윗부분만 드러나게 했다. 이를 5열로 엮어 '포도나무(vines)'라 불렀는데, 걸리면 뾰족한 가지에 찔려 옴짝달싹 못 했다. 그 앞에 깊이 3피트의 비스듬한 구멍을 파고 허벅지 굵기의 말린 둥근 말뚝을 불에 그을려 끝을 뾰족하게 해 땅 위로 네 마디만 나오게 박았다. 땅을 단단히 다지고 가시덤불로 덮어 함정을 숨겼는데, 3피트 간격으로 8열을 만들어 백합꽃 모양이라 '백합(lilies)'이라 불렀다. 전체 앞에는 길이 1피트 함정에 철심을 박아 짧은 간격으로 촘촘히 심어 '자극(goads)'이라 불렀다.

이 공사를 마친 뒤, 카이사르는 지형이 허락하는 가장 평탄한 곳에 둘레 14,000보의 외곽 포위선(대향선)을 안쪽과 같은 방식으로, 그러나 바깥쪽(구원군 쪽)을 향하게 구축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 다수의 적에게 포위선이 점거당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병사들이 진영을 나설 때 겪을 위험을 막고자, 전원에게 30일 치 사료와 식량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갈리아 구원군의 편성

알레시아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갈리아 수장들은 회합을 열어 베르킨게토릭스의 뜻대로 전원 징집이 아닌 부족별 할당제로 병력을 모으기로 했다. 대규모 인원의 군율 유지, 식량, 식별이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이두이족과 그 종속족 35,000명, 아르베르니족과 속방 부족 35,000명, 세노네스·세콰니·비투리게스·산토네스·루테니·카르누테스 각 12,000명, 벨로바키·레모비케스 각 10,000명, 픽토네스·투로네스·파리시·헬베티이 각 8,000명, 암비아니·메디오마트리케스·페트로코리이·네르비이·모리니·니티오브리게스 각 5,000명, 아울레르키 케노만니 5,000명, 아트레바테스 4,000명, 벨리오카세스·렉소비이·아울레르키 에부로비케스 각 3,000명, 라우라키와 보이이 1,000명, 대서양 연안 아르모리카 부족(쿠리오솔리테스·레도네스·암비바리·칼레테스·오시스메스·레모비케스·우넬리) 총 20,000명이었다. 벨로바키족만이 독자적으로 싸우겠다며 거부했으나, 동맹자 콤미우스의 간청으로 2,000명을 보냈다.

이 콤미우스는 수년 전 브리타니아 원정 때 카이사르가 신임하던 인물로, 카이사르는 그의 공로로 부족에 조공을 면제하고 권리와 법률을 되돌려주었으며 모리니족을 복속시켰다. 하지만 갈리아인들은 자유 회복과 옛 무훈의 영광을 위해 은혜도 우정도 마다하고, 기병 8,000명과 보병 약 24만 명을 집결시켰다. 하이두이족 땅에서 점검과 계수를 마친 뒤, 아트레바테스 콤미우스, 하이두이족 비리도마루스와 에포레도릭스, 아르베르니족 베르카시벨라우누스(베르킨게토릭스 사촌) 4인에게 총지휘권을 주고, 각 부족 대표로 전쟁 지도부를 꾸렸다. 이들은 알레시아로 향하며 자신만만해했다. 로마군이 포위된 자들의 출격과 외부 포위망의 협공에 동시에 시달릴 테니, 이 많은 대군을 당해낼 수 없다고 믿었다.

크리토그나투스의 연설

알레시아 포위군의 식량이 다 떨어지고 약속한 구원군 소식도 없자, 그들은 대책을 논의했다. 항복하자는 의견, 남은 힘으로 돌격하자는 의견 중, 아르베르니족 귀족 크리토그나투스의 잔혹한 연설이 눈에 띈다. 그는 "노예가 되느니 항복하자는 자들은 시민도 아니다. 돌격파의 의견은 용기보다 나약함에서 나왔다. 죽음은 쉬워도 고통을 견디는 건 어렵다. 하지만 우리 목숨만 걸린 게 아니다. 8만 명이 여기서 죽으면, 구원하러 온 부모 형제는 우리 시체 위에서 싸워야 한다. 구원군이 늦는다고 불신을 가져선 안 된다. 로마인들이 밤낮으로 새 공사를 하는 건 구원군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조상들은 킴브리·튜톤 전쟁 때 성에 갇혀 굶주릴 때, 전쟁에 쓸모없는 노약자의 살을 먹으며 버텼고 항복하지 않았다. 그 본보기가 없다면 자유를 위해 우리가 그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킴브리족은 갈리아를 망치고 떠났지만 권리·법률·토지·자유는 남겼다. 로마인들은 무엇 때문에 오는가? 명성 있는 자를 시기해 그들의 땅과 도시에 정착시키고 영원한 노예의 멍에를 씌우려 한다. 근처 속주 갈리아가 권리와 법률을 잃고 로마 도끼 아래 신음하는 것을 보라."

비전투원의 추방

의견 수렴 결과, 병역 불가한 노약자는 내보내고 크리토그나투스의 안은 최후 수단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들을 받아들였던 만두비족도 처자식과 함께 쫓겨났다. 이들은 로마 진지에 다가가 울며 노예가 되게 해달라, 빵을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성벽에 경비병을 세워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구원군 도착과 첫 충돌

한편 총사령관 콤미우스 등이 대군을 이끌고 알레시아 인근 언덕에 진을 쳤다. 이튿날 기병을 평야 전체에 펼치고 보병은 언덕에 숨겼다. 알레시아에서 이 광경이 훤히 보였다. 포위된 군은 환호하며 첫 참호를 메우고 널빤지와 흙으로 덮으며 출격을 준비했다. 카이사르는 전군을 양쪽 포위선에 배치해 각자 맡은 위치를 숙지시키고, 기병을 내보내 전투를 개시했다. 높은 진영에서 전장이 보였고, 모든 병사가 숨죽여 지켜봤다. 갈리아군은 기병 사이에 경무장 궁수와 보병을 섞어 아군 기병을 지원하고 우리 돌격을 저지하려 했다. 아군 기병 몇이 보병 습격에 부상당해 물러났다.

갈리아군은 자신들이 우세하다 판단하고, 포위군과 구원군 양쪽에서 함성을 질러 아군을 독려했다. 양쪽 모두 지켜보는 눈 앞에서 싸우니 용기와 비겁함이 낱낱이 드러나, 명예욕과 수치심으로 양군 모두 분투했다. 정오부터 해 질 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던 중, 게르만 기병이 한곳으로 모여 밀집 대형으로 적을 들이받아 격퇴했다. 궁수들은 버려져 도륙당했고, 도망치는 적을 진영까지 추격해 재정비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알레시아에서 출격했던 갈리아군은 실의에 빠져 도시로 돌아갔다.

로마 진지 야간 공격 실패

갈리아군은 하루 동안 판자, 사다리, 갈고리창을 대량 제작한 뒤 야밤에 조용히 평야 쪽 포위선에 접근했다. 함성을 지르며 신호를 보내고 판자를 던지며 돌, 화살, 투석으로 성벽 경비병을 공격했다. 동시에 베르킨게토릭스도 나팔 신호로 출격시켰다. 아군 병사들은 미리 정해진 위치에서 투석, 투창, 납탄, 돌멩이를 퍼부어 적을 위협했다. 야간이라 시야가 나빠 양측 피해가 컸고, 투석기가 포위선을 강타했다. 안토니우스와 트레보니우스 부관이 먼 보루에서 지원군을 뽑아 위급한 지점에 투입했다.

갈리아군이 포위선에서 멀리 싸울 때는 수많은 투창으로 우리를 괴롭혔으나, 다가올수록 보이지 않는 '자극'에 찔리거나 말뚝 참호에 빠지거나, 성벽과 망루에서 쏟아지는 투창에 쓰러졌다. 큰 피해만 입고 포위선을 뚫지 못한 채 동이 트자 측면 포위와 고지 진영 출격을 두려워해 퇴각했다. 첫 참호를 메우던 포위군도 아군 퇴각을 보고 작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돌아갔다.

결사적인 방어전

두 차례 격퇴당한 갈리아군은 지형에 밝은 자문을 구해 북쪽 고지 우리 보루의 허점을 파악했다. 포위선 둘레가 너무 넓어 포함하지 못한 언덕이 있었고, 불가피하게 중턱 불리한 지점에 안티스티우스 레기누스와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부관 휘하 두 개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정찰 끝에 갈리아 수뇌부는 전군 중 용맹하기로 소문난 부족에서 6만 정예병을 뽑아 정오 공격을 결정하고, 베르카시벨라우누스를 선봉에 세웠다. 1경에 출발해 새벽 전 고지 뒤에 숨어 쉬다가 정오쯤 해당 진지로 향했다. 동시에 평야 포위선에는 기병이, 고지 진영 앞에는 주력 보병이 전개했다.

알레시아 성채에서 이를 본 베르킨게토릭스도 긴 장대, 엄개, 갈고리낫 등 준비한 장비를 들고 출격했다. 사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취약한 곳이 보이면 병력을 급파했다. 지나치게 긴 포위선 탓에 로마군은 모든 지점을 지킬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함성은 아군에게 공포를 더했다. 먼 곳의 위험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황을 살피기 좋은 위치에 있던 카이사르는 위급한 곳에 지원군을 보냈다. 오늘, 지금이 마지막 승부처임을 양군 모두 알았다. 갈리아군은 포위선을 뚫지 못하면 살길이 없고, 로마군은 승리만이 고생의 끝이었다. 특히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공격한 고지 보루에서 전투가 가장 치열했다. 좁은 봉우리가 전략적 요충이었다. 투창을 던지는 자, 거북진(테스투도)을 짜고 성벽 아래 다가오는 자, 지친 병사를 대신해 새 병력이 계속 들어왔다. 갈리아군이 던진 흙이 참호와 함정을 메워주니 접근이 쉬워졌고, 아군은 무기력과 무기 부족에 시달렸다.

보고를 받은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에게 6개 코호르트를 보내며, 버티다 안 되면 최후의 순간에 출격하라고 지시했다. 자신은 다른 부대를 독려하며 "지난 모든 전투의 결실이 오늘 이 한 시간에 달렸다"고 외쳤다. 평야 포위선 돌파를 단념한 포위군은 고지로 몰려들어 모든 공격 수단을 동원했다. 망루 위 병사를 화살비로 몰아내고, 참호를 흙과 파시네로 메워 올라가며, 갈고리낫으로 성벽과 여첩을 찍어 내렸다.

카이사르는 젊은 브루투스에게 6개 코호르트, 파비우스 부관에게 7개 코호르트를 차례로 보냈고, 전세가 격해지자 직접 신선한 병력을 이끌고 나갔다. 전세를 뒤집고 적을 물리친 뒤, 라비에누스에게 간 지점으로 향했다. 인근 보루에서 4개 코호르트를 뽑고, 기병 일부를 동행시키고 나머지는 외곽 포위선 밖으로 돌려 적 후방을 치게 했다. 라비에누스는 성벽과 참호로 막을 수 없자 인근 보루에서 39개 코호르트를 긁어모아 카이사르에게 전령을 보냈다.

카이사르의 최종 승리

카이사르는 현장으로 급히 향했다. 도착하자 전투복 색깔로 아군에게 식별되었고, 고지에서 내려오는 그를 본 적도 맞섰다. 양측에서 함성이 터지고 성벽과 참호 전체로 퍼졌다. 아병은 투창을 버리고 검을 뽑았다. 그때 적 후방에 아군 기병이 나타났고, 다른 코호르트들도 접근했다. 갈리아군은 도망쳤고, 아군 기병이 퇴로를 막아 대살육을 벌였다. 레모비케스족 왕 세둘루스가 전사하고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생포됐다. 74개 군기(軍旗)가 카이사르에게 바쳐졌고, 수많은 적군 중 무사히 진영으로 돌아온 자는 극소수였다. 성벽 위에서 아군 패주와 살육을 본 포위군은 절망해 공격을 멈추고 철수했다. 소식은 갈리아 구원군 진영에 전해졌고, 이들은 즉시 야영지를 버렸다. 아군 병사가 하루 종일 전투와 노역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적군 전체를 섬멸할 수 있었다. 심야에 추격 나선 기병이 후위부대를 따라잡아 다수 생포·살상하고, 나머지는 각 도시로 도망쳤다.

베르킨게토릭스의 항복

이튿날 베르킨게토릭스는 집회를 열고 "사사로운 이익이 아닌 공동의 자유를 위해 싸웠으나 운명에 져야 한다. 내 죽음으로 로마를 달래든지, 산 채로 넘기든지 선택하라"고 했다. 사절이 카이사르에게 갔다. 카이사르는 무장 해제와 수장 인도를 명령했다. 진영 앞 법정에 앉아 적장들을 불러들였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넘겨지고 무기들이 발밑에 던져졌다. 하이두이족과 아르베르니족은 회유책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포로는 병사 1인당 1명씩 전리품으로 분배했다.

하이두이족과 아르베르니족의 복종, 동계 주둔

일을 마친 카이사르는 하이두이족 땅으로 가 항복을 받았다. 아르베르니족 사절도 와 복종을 약속했고, 다수 인질을 요구했다. 군단을 동계 영지에 들이고, 하이두이족과 아르베르니족 포로 약 2만 명을 돌려보냈다. 라비에누스에게 2개 군단과 기병을 주어 세콰니족 땅으로, 세프로니우스 루틸리우스를 동행시켰다. 파비우스와 바실루스에게 2개 군단으로 레미족을 벨로바키족으로부터 지키게 했다. 안티스티우스 레기누스를 암비바레테스족, 섹스티우스를 비투리게스족, 카니니우스 레빌루스를 루테니족 땅에 각 1개 군단씩 배치했다. 키케로와 술피키우스를 카빌론(샬롱)과 마티스콘(마콩), 하이두이족 땅 손 강가에 주둔시켜 보급을 확보했다. 카이사르 자신은 비브락테에서 겨울을 나기로 했다. 이 소식이 카이사르 서신으로 로마에 전해지자, 20일간의 공공 기도제가 선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