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한니발
로마인이 온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민족이라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 한니발이 지금까지 살았던 장수 중 가장 위대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다른 장군들에게 로마가 다른 민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월등히 뛰어났다. 그는 로마를 상대로 치른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동포들의 질투만 아니었다면 로마 인민을 정복하는 것으로 전쟁을 끝맺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수의 시기가 한 사람의 공로를 압도하고 말았다.
그는 아버지가 로마인들에게 맹세한 증오를 유산으로 물려받아 마지막 숨결까지 간직했다. 고국에서 추방되어 외국의 원조를 빌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지라도, 그의 팔이 아니라 마음이 늘 로마와 싸웠다.
1. 아홉 살의 맹세, 평생의 숙적
먼 거리에 있던 필리포스를 로마의 적으로 돌려세운 것뿐 아니라, 당대 최강의 왕 안티오코스 3세를 부추겨 로마에 맞서게 했다. 이 왕은 한니발의 조언에 고무되어 홍해 연안의 영토에서 이탈리아로 전쟁을 옮기려 했다. 로마 사절단이 그의 의도를 탐지하러 왔을 때, 한니발을 모함하여 안티오코스의 의심을 사게 하려 공작했다. 그들은 한니발이 자신들에게 매수되어 마음이 변했다고 모함했고, 왕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모든 전쟁 회의에서 배제된 한니발은 안티오코스에게 알현을 청해 충성을 맹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스페인 총독으로 부임하며 유피테르에게 제사를 지냈다. 제사 중 아버지께서 나와 동행할지 물으셨고, 나는 가고 싶다고 간청했다. 아버지는 '좋다, 단 한 가지 조건으로'라며 나를 제단으로 데려가 수행원들을 물리고 제단에 손을 얹고 로마인에 대한 영원한 증세를 맹세하게 하셨다. 그날 아버지께 맹세한 그 맹세를 오늘까지 지켰으며, 내 충성이 미래를 보증한다. 그대들이 로마와 화친하려거든 내게 숨기는 게 좋을 것이며, 전쟁을 준비한다면 나 아닌 다른 장수를 택함이 그대들의 이익에 반하는 일이다."
2. 스페인 정복과 알프스 산맥 횡단
아홉 살에 아버지 하밀카르와 스페인으로 건너간 한니발은, 아버지가 전사하자 하스드루발 휘하에서 기병대장을 맡았다. 하스드루발마저 암살당하자 군대가 그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했고, 카르타고도 이를 승인하여 스물다섯 살도 되기 전에 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불과 3년 만에 스페인을 평정하고, 로마의 동맹 도시 사군툼을 함락시켰으며, 세 개의 군단을 편성했다. 하나는 아프리카로, 다른 하나는 동생 하스드루발에게 맡겨 스페인에 남기고, 자신은 마지막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피레네산맥을 넘으며 가는 곳마다 전투를 치러 모두 이겼고, 이탈리아와 갈리아를 가르는 알프스산맥 기슭에 닿았다. 당시까지 헤라클레스를 제외하고 군대를 이끌고 넘은 이가 없어 '그리스 알프스'라 불리던 험준한 산맥이었다.
한니발은 산악 부족의 저항을 물리치고, 인력으로 새로운 길을 내며, 무장한 코끼리까지 단창 하나 의지할 수 없는 좁은 벼랑 길로 통과시켰다. 그 길로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내려왔다.
3. 연전연승, 로마를 농락하다
이미 론 강변에서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격파한 바 있던 한니발은, 포 강 근처에서 다시 그를 맞아 패주시켰고, 스키피오는 클라스티디움 전투에서 부상당했다. 세 번째로 트레비아 강 근처에서 스키피오와 그의 동료 티베리우스 롱구스가 연합해 덤벼들었으나, 한니발은 이들도 격파했다.
이후 리구리아를 거쳐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에트루리아로 진군하던 중 심한 안질(눈병)을 얻어 평생 오른쪽 눈을 제대로 못 쓰게 되었다. 심지어 들것에 실려 다녀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음에도, 트라시메누스 호수 근처에서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매복으로 유인해 섬멸했고, 플라미니우스는 전사했다. 뒤이어 법무관 켄테니우스도 정예 부대를 이끌고 요새를 지키다 같은 운명을 맞았다.
아풀리아에 이르러 두 집정관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이끄는 대군과 맞붙어 단일 전투로 둘 다 격파했다. 파울루스 집정관이 전사했고, 전년도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등 다수의 원로원 의원급 장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4. 로마 목전까지, 파비우스의 포위망을 뚫다
이 전투(칸나이 전투) 후 한니발은 저항 없이 로마 코앞까지 진군해 인근 고지에 진을 쳤다. 며칠 뒤 카푸아로 철수하려던 차,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팔레르누스 영토에서 그의 퇴로를 차단해 협곡에 가두려 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야밤에 피해 하나 없이 탈출했다. '지연 전술'의 대가 파비우스를 오히려 농락한 것이다.
어둠을 틈타 어린 황소들의 뿔에 나뭇가지를 묶어 불을 붙이고 들판으로 내보냈다. 이 기괴한 광경에 로마군은 겁을 먹고 참호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며칠 뒤 기병대장 미누키우스 루푸스를 교묘히 유인해 격파했고, 부재중에도 루카니아에서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를, 베누시아 근처에서 5선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매복으로 제거했다. 한니발의 모든 승리를 열거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그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정면 전투에서 그를 당해낸 군대는 단 하나도 없었고, 칸나이 전투 이후 그 어떤 장수도 감히 그와 진을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우월함은 입증된다.
5. 자마의 패배와 망명의 시작
고국 방위를 위해 소환된 이 불패의 장군은, 론 강·포 강·트레비아 강에서 세 번이나 자신을 격파했던 '대 스키피오'의 아들,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와 자마에서 맞붙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한니발은 휴전을 청해 전세를 회복하려 했으나 조건 합의에 실패했고, 며칠 뒤 자마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한니발은 패배했고, 자마에서 아드루메툼(약 480km)까지 단 이틀 밤낮 만에 주파하는 기적을 보였다. 도망치는 도중 동행하던 누미디아 기병들이 그를 습격했으나, 그는 이를 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섬멸했다. 아드루메툼에서 패잔병을 모아 며칠 만에 신병 징집으로 군세를 재건했다.
6. 정치가로서의 수완과 두 번째 망명
전쟁 준비를 서두르던 중 카르타고가 로마와 강화를 맺었다. 그럼에도 한니발은 지휘권을 유지하며 동생 마고와 함께 아프리카 원정을 지휘했다. 기원전 210년(술피키우스와 아우렐리우스 집정관 시절), 카르타고가 로마에 사절을 보내 금관을 바치며 인질 이송과 포로 송환을 요청했다. 로마는 선물과 인질 이송은 받아들였으나, '전쟁의 주모자이자 로마의 맹세된 적인 한니발과 마고가 군권을 쥐고 있는 한 포로는 돌려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 소식이 카르타고에 닿자 한니발과 마고는 소환되었고, 한니발은 프라이토르(집정관에 준하는 최고 행정관)에 선출되었다. 22년 전만 해도 '왕(수페테)' 자리에 올랐던 그였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집정관처럼 매년 두 명의 왕을 선출했다. 한니발은 군령만큼이나 행정에서도 탁월했다. 신세를 창설해 로마에 배상금을 갚고 남은 재원을 국고에 채워 넣었다.
하지만 1년 뒤, 로마가 사절을 카르타고에 파견하자 한니발은 자신이 표적임을 직감했다. 원로원의 접견을 기다리지 않고 비밀리에 배를 타고 시리아 안티오코스 3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도주 소식이 퍼지자 추격함 두 척이 뒤따랐고, 그의 재산은 공매에 부쳐졌으며 집은 허물어졌고, 그는 공식적으로 추방 선고를 받았다.
7. 안티오코스 휘하에서, 크레타에서의 기지
3년 뒤(기원전 183년 경), 키레네 해안에 5척의 배로 상륙한 한니발은 안티오코스가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 중이라며 카르타고인들을 선동하려 했다. 동생 마고를 불렀으나, 마고의 출항 소식이 알려지자 카르타고는 한니발과 같은 형벌을 마고에게 내렸다. 희망을 잃은 형제는 다시 안티오코스에게로 향했으나, 마고는 도중 사망했다. 사료에 따라 난파사인지, 노비의 손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안티오코스가 한니발의 계책대로 로마에 맞섰더라면, 결전지는 테르모필레가 아닌 티베르 강변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 중 안티오코스의 방탕한 행실에도 한니발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시리아에서 아시아로 파견할 함대 사령관을 맡아 팜필리아 해상에서 로도스 함대와 교전했다. 수적 열세로 아군 함대가 무너지는 와중에도, 자신이 탄 쪽에서는 우세를 점했다.
8. 크레타에서의 기지, 프루시아스 왕에게로
안티오코스가 패한 뒤, 한니발은 로마에 인도될 위기를 느껴 크레타 섬 고르티나로 피신했다. 거액의 재물을 동반했음이 소문났고, 크레타인들의 탐욕을 잘 알던 그는 기발한 속임수로 재산을 지켰다.
여러 항아리에 납을 채우고 표면만 금과 은으로 덮어, 도시 유지들이 보는 앞에서 디아나 신전에 '신탁물'로 맡겼다. 크레타인들은 도둑을 막는 척하며 실은 한니발이 찾아가지 못하게 신전 입구를 철통같이 지켰다. 그 사이 한니발은 진짜 재물을 청동 상 속에 숨겨 집 현관에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었다.
9. 프루시아스 왕과 뱀 작전
크레타를 빠져나온 한니발은 폰투스 왕 프루시아스의 궁정으로 갔다. 변함없는 로마에 대한 증오로 이 왕을 반로마 진영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다. 프루시아스가 단독으론 약했기에 타국 왕들과 동맹을 맺게 하고, 로마의 충실한 동맹국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와 전쟁하게 부추겼다. 지상전과 해전 모두 에우메네스의 로마 동맹이 우세였다. 에우메네스만 제거하면 한니발의 구상이 실현될 터.
임박한 해전에서 열세인 함선을 만회할 계책으로, 독사를 진흙 항아리에 가득 담아 봉인해 두었다. 전투 당일 장교들에게 "왕의 배만 노려라. 나머지 함선은 독사 항아리만으로도 감당 못 할 것이다. 에우메네스를 생포하거나 시신을 가져오는 자에게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함대가 맞붙자 한니발은 전령을 소형선에 태워 카두케우스(헤르메스의 지팡이)를 들고 에우메네스 함대에 접근시켰다. 전령이 편지를 내밀며 왕과 담판하겠다고 하자, 강화 제의로 알고 에우메네스가 그를 불러들였다. 전령이 왕의 위치를 확인하고 돌아가자, 에우메네스가 편지를 펼쳤으나 내용은 조롱뿐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사이 비티니아 함대가 일제히 왕의 배로 쇄도했고, 에우메네스는 간신히 해안 정박지로 도주해 목숨을 건졌다.
그 사이 다른 아군 함정들이 프루시아스와 한니발의 함대를 압박해 왔다. 그때 진흙 항아리들을 적선에 투척했다. 적들은 처음엔 기이한 투척물에 웃었으나, 항아리가 깨지며 독사들이 쏟아지자 공포에 질려 갈피를 못 잡다 닻을 올리고 퇴각했다. 이렇게 한니발은 계책으로 페르가몬의 강군을 격파했다. 이런 책략은 육전에서도 수차례 써먹어 적을 궤멸시켰다.
10. 최후: 독배를 들다
이 무렵, 프루시아스 사절단이 로마에서 루키우스 퀸투스 플라미니누스(전직 집정관)와 만찬 중 한니발 화제가 나왔다. 한 사절이 '비티니아 왕궁에 있다'고 실토했고, 이튿날 플라미니누스가 원로원에 보고했다. '한니발이 살아있는 한 로마는 늘 위협을 받는다'고 판단한 원로원은 플라미니누스 등을 사절로 보내, '로마의 가장 잔혹한 적을 궁정에 두지 말라'고 압박했다.
프루시아스는 거절 못 했으나 '객주(접대)의 예는 어기지 않게 해달라'고만 청했다. "데려갈 수 있으면 데려가라. 은신처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고 비아냥거렸다. 한니발은 왕이 하사한 성에 기거하며, 이 날이 올 줄 알고 사방에 비밀 통로를 뚫어두었다. 로마 사절단이 포위망을 좁히자 문지기가 병사를 보고 뛰어와 알렸다. 한니발은 다른 문도 포위됐는지 확인하라고 보냈고, 잠시 뒤 '사방이 포위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우연이 아님을, 자신의 신병을 노림임을 직감한 그는, 지난 영광을 되새기며 평소 품고 다니던 독약을 들이켰다.
11. 생애를 마치며
그는 일흔 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일생은 끊임없는 고난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정확한 사망 집정관 연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티쿠스는 '마르켈루스와 파비우스 라베오 집정관 때', 폴리비오스는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그나이우스 베비우스 탐필루스 때', 술피키우스는 '케테구스와 마르쿠스 베비우스 탐필루스 때'라고 각각 다르게 기록했다.
평생 전쟁에 매진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그리스어 저작 여러 권을 남겼는데,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의 아시아 원정사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로도스인들에게 바쳐졌다. 한니발의 원정을 기록한 주요 사료로는 그와 동행했던 실레누스와 스파르타의 소실루스의 저작이 꼽히며, 소실루스가 한니발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이제 이 첫 번째 장(로마 장수들과의 비교를 위한 외국 장수 열전)을 마치고, 로마 장수들의 열전을 시작하려 한다. 이를 통해 각자의 공적을 비교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