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켈루스는 에우리알로스 요새를 장악한 뒤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제 성채에 대규모 병력이 들어와도 후방에서 기습당할 염려는 사라진 것이다. 좁은 성벽 안에서는 병력을 제대로 전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리한 지점에 세 개의 진영을 배치해 아크라디네를 포위하고, 절대적인 물자 부족으로 포위된 자들을 굴복시키려 했다.
며칠간 양측은 침묵을 지켰으나, 히포크라테스와 힐밀콘이 도착하면서 로마군은 여러 방면에서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게 되었다. 히포크라테스는 대항만 근처에 진영을 세우고, 그곳에서 아크라디네 수비대에게 신호를 보낸 뒤 크리스피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옛 진영을 공격했다. 한편 에피키데스는 마르켈루스의 전초기지를 기습했고, 카르타고 함대는 도시와 로마 진영 사이 해안으로 접근해 마르켈루스가 크리스피누스에게 원군을 보내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적의 기습은 전투라기보다 소동에 가까웠다. 크리스피누스는 히포크라테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격파해 도주하게 만들고 추격까지 감행했다. 마르켈루스 역시 에피키데스를 시내로 몰아냈으며, 이후로는 갑작스러운 출격의 위협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전쟁보다 무서운 재앙, 역병의 창궐
전쟁의 참화에 더해 전염병이라는 재앙이 양측을 덮쳐 적대 행위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가을의 과도한 더위와 불결한 기후 탓에 양 진영에서 거의 만연적인 유행병이 번졌는데, 특히 성안보다 성 밖이 훨씬 심각했다. 처음에는 가을철 날씨와 오염된 공기가 치명적인 질병을 불러왔고, 곧 환자를 돌보는 과정과 접촉을 통해 전염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병든 이들을 아무런 도움과 위로 없이 죽게 내버려두거나, 곁에서 간호하면서 역병의 독기를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눈앞에서 죽음과 장례식만을 마주했고, 밤낮으로 신음 소리만이 들려왔다. 눈물과 슬픔은 바쳤지만, 정작 시신을 옮겨 묻는 일조차 등한시될 정도였다. 땅에는 같은 운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시체가 그대로 널려 있었다. 두려움과 죽어가는 이들이 풍기는 악취는 병자의 죽음을 앞당겼고, 아직 감염되지 않은 이들마저 옮겨갔다. 어떤 이들은 차라리 검에 죽기를 택해 혼자 적의 초소를 공격하러 나서기도 했다.
궤멸한 카르타고군, 시내로 옮긴 로마군
그러나 역병은 오랜 포위전으로 현지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한 로마군 진영보다 카르타고군 진영에서 훨씬 큰 참화를 낳았다. 적진에 속해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 전염병이 그곳의 불결한 환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시라쿠사에서 멀지 않은 자기들의 도시로 서둘러 돌아갔다. 반면 다른 피난처가 없던 카르타고인들은 지휘관 히포크라테스와 힐밀콘을 비롯해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역병이 더욱 거세지자, 마르켈루스는 병사들을 시내로 옮겨 지붕과 그늘이 지친 몸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도록 했다. 그럼에도 이 재앙은 로마군에서도 많은 병사들을 앗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