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원형, 쿠훌린
아일랜드 켈트 신화에서 쿠훌린(Cú Chulainn)은 '영웅'의 원형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로, 준신(半神)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뛰어난 육체적 능력과 마법 같은 힘, 그리고 신들의 후원까지 갖춘 그는 불가능한 것이 없는 초인적인 영웅이었습니다. 전투에 돌입하면 이성을 잃고 광기처럼 싸우는 모습 때문에 '버서커(berserk)'의 원형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의 대표 무기는 게 볼가(Gae Bolga), 이른바 '번개 창'입니다. 이 창은 적의 몸에 꽂히면 철제 창끝이 갈고리처럼 여러 갈래로 벌어져 반드시 치명상을 입히는 무시무시한 무기였습니다. 쿠훌린은 스코틀란드에 머무는 동안 전설의 여전사 스카하크(Scáthach)에게 이 창을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쿠훌린은 무려 76편에 달하는 서사시와 설화에 등장합니다. 다만 판본마다 그의 행적이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는데, 어떤 이야기들은 서로 보완 관계에 있고, 어떤 것들은 모순되기도 합니다. 그의 영웅담은 투아하 데 다난(Tuatha Dé Danann)이 다스리던 시대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탄타에서 쿠훌린으로: 이름의 유래
쿠훌린의 본래 이름은 세탄타(Setanta)였습니다. 다섯 살 되던 해, 그는 대장장이 컬런(Culann)의 집을 방문했다가 사나운 파수견을 맨손으로 죽이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할아버지이자 스승인 드루이드 카스바드(Cathbad)는 이를 계기로 그에게 '컬런의 개'라는 뜻의 새 이름, 쿠훌린을 지어 주었습니다. 자신이 죽인 개를 대신해 컬런의 집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어린 세탄타의 결심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복합적인 탄생 배경
쿠훌린의 탄생은 여러 겹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적인 차원에서 그는 켈트 신화의 최고신이며 모든 기술에 정통한 루(Lug)와, 모든 신들의 어머니이자 모성의 상징인 에트네(Eithne)의 아들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얼스터의 왕 콘코바르 막 네사(Conchobar Mac Nessa)가 다른 세계에서 여동생이자 마부인 데흐티레(Deichtire)를 만나면서 잉태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의 양아버지는 수알탐(Sualtam)이고, 축양부는 콘코바르 왕의 시인 아모르겐(Amorgen)입니다. 그는 '요새'를 뜻하는 던(Dun)과 '평원'을 뜻하는 마그(Mag)라는 단어가 들어간, 마그 무르템 평원의 던 델간(Dun Delgan)에서 살았습니다.
변신 능력과 지혜의 화신
쿠훌린은 때때로 '곡예사'라고도 불립니다. 그는 몸을 온갖 형상으로 변형시키는 능력을 지녔으며, 달아오른 몸의 열기로 물을 끓이고 눈을 녹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지식의 화신으로, 머리에서 지혜가 빛을 발한다고 표현됩니다.
그는 친구 페르디아드(Ferdiad)와 함께 스코틀란드에서 위대한 마법사 스카하크의 가르침을 받았고, 스카하크의 딸 우아타크(Uatach)와 결혼하기도 했습니다. 훗날 에머(Emer)와 혼인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납치해야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에는 다른 세계에서 요정 여인 판드(Fand)와 짧지만 뜨거운 연애를 하기도 했습니다.
쿨리 소몰이 전쟁과 영웅의 최후
쿠훌린의 모험과 무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특히 대서사시 『타인 보 쿠일러(Táin Bó Cúailnge, 쿨리의 소몰이)』에서 그는 여신 마하(Macha)의 저주로 고통에 시달리는 얼스터의 남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저주를 피한 인물로, 코노트(Connacht)의 여왕 메브(Medb)가 이끄는 군대에 맞서 얼스터를 홀로 지켜냅니다. 저주가 끝날 때까지 그는 쉬지 않고 싸우며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영웅의 끝은 처량했습니다. 쿠훌린은 삼하인(Samhain, 켈트력의 새해 첫날)에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순간 전쟁의 여신 모리간(The Morrígan)이 까마귀의 모습으로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전사의 마법, 그러나 주권에는 닿지 못하다
쿠훌린은 전사의 마법을 상징하는 존재였지만, 여러 차례 도전했음에도 왕권, 즉 주권(sovereignty)을 손에 넣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한편 그의 말 중 하나인 리아 마하(Liath Macha, '마하의 회색 말')는 인간의 지능을 지닌 명마로 유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