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란 무엇인가
카이사르(Caesar)는 로마 황제들이 사용한 칭호 중 하나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고대 이후 여러 나라의 군주 칭호로 파생되어 유럽과 동방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 독일 — 카이저(Kaiser)
- 러시아 · 불가리아 · 세르비아 — 차르(Tsar, 1914년 이전에는 Czar로 표기)
- 헝가리 — 치사르(Csiszár)
- 오스만 제국 — 카이사르(Kaysar)
로마 제국에서의 카이사르 칭호
'카이사르'라는 명칭은 흔히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98년까지 통치한 열한 명의 황제, 즉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를 지칭하는 데 쓰입니다. 물론 뒤의 여섯 명은 카이사르 가문과는 전혀 혈연 관계가 없습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이들을 다룬 『열두 카이사르 전(傳)』을 저술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카이사르는 황제들의 프라이노멘(praenomen, 성씨인 노멘 앞에 붙는 이름으로 현대의 '이름'과 정확히 같은 개념은 아님)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임페라토르(imperator) 칭호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사두정치(Tetrarchy)를 도입했습니다. 두 명의 카이사르가 두 아우구스투스의 부황제(副皇帝)로 임명되는 체제였으나, 이 조직은 306년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군대에 의해 카이사르로 추대되면서 시작된 사두정치의 붕괴를 함께 견디지 못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 칭호를 다시 사용했지만, 목적은 달랐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황제의 지위를 부여하고 제국의 특정 지역에 배치해 자신을 대신 통치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사촌인 갈루스를, 이어 율리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했습니다. 이들의 지위는 사두정치 시절의 카이사르와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 왕자들 사이의 중간 단계였습니다. 황실 가문의 일원으로서 황제 특유의 신비로운 권위를 지녔고, 황제를 대표하며 일정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동시에 매우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갈루스가 안티오키아에서 저지른 잘못으로 처형되고, 율리아누스가 찬탈을 감행한 이후, 후대 황제들은 이 방식이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더 이상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 즉위의 첫 단계를 부여할 때는 중간 단계 없이 곧바로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에서의 카이사르 칭호
콘스탄티노플에서 헤라클리우스 황제(재위 610~641)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등 라틴어 계열의 칭호 사용을 포기하고 그리스어식 바실레우스(basileus) 칭호를 채택했습니다. 그럼에도 카이사르 칭호는 비잔틴의 작위 체계에 그대로 남아 바실레우스 바로 다음 순위를 차지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특별한 의식에서는 이 칭호가 처음으로 이민족 군주에게 수여되기도 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재위 705~711)는 황좌를 되찾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불가리아의 카간 테르벨에게 보답으로 이 칭호를 하사한 것입니다.
그 이후 카이사르 칭호는 극히 드문 경우에만, 그것도 오직 황실의 핵심 인물에게만 수여되었습니다. 그러나 11세기에 들어 명예 칭호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카이사르의 서열은 점차 뒤로 밀려났습니다.
- 알렉시오스 1세 코무네노스 — 세바스토크라토르(sebastokrator) 칭호를 새로 창설하며 카이사르를 3위로 밀어냈습니다.
- 마누일 1세 코무네노스 — 데스포트(despot) 칭호를 신설하면서 카이사르를 4위로 추가 격하시켰습니다.
-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 카탈루냐 용병 대장 로제 드 플뢰르(Roger Flore)에게 이 칭호를 내려 카이사르의 권위를 다시 한 번 떨어뜨렸습니다.
이처럼 카이사르 칭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출발해 로마와 비잔틴 제국의 권력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의미가 변화했으며, 나아가 유럽 여러 나라 군주 칭호의 어원이 되는 등 서양 역사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