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카라칼라: 로마 제국의 폭군이자 시민권을 부여한 황제

카라칼라: 로마 제국의 폭군이자 시민권을 부여한 황제

카라칼라(Caracalla, 188년 4월 4일 ~ 217년 4월 8일)는 본명이 루키우스 세프티미우스 바시아누스(Lucius Septimius Bassianus)였으며,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Marcus Aurelius Severus Antoninus Augustus)로 개명한 로마 황제다. 그는 211년부터 217년까지 제국을 통치했으며, 로마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확대 부여한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을 반포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년기

카라칼라는 아버지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를 통해 포에니(카르타고)와 베르베르 혈통을, 어머니 율리아 도므나를 통해 시리아 혈통을 이었다. 188년, 당시 갈리아 총독이던 아버지를 따라 루그두눔(오늘날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으며, 출생지는 현재 생피에르 궁(Palais Saint-Pierre)이 있는 일대로 추정된다.

출생 시에는 루키우스 세프티미우스 바시아누스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훗날 안토니누스 왕조와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개명했다. '카라칼라'라는 별명은 그가 열두 살 무렵부터 즐겨 입던, 긴 소매와 후드가 달린 갈리아식 외투에서 유래했다.

권력 장악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는 198년 카라칼라를, 209년 게타를 각각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해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211년 세베루스가 사망하자 군대는 그의 유언을 존중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고, 카라칼라는 어쩔 수 없이 동생 푸블리우스 세프티미우스 게타와 권력을 나누어야 했다.

평화가 회복되고 군대가 해산된 뒤 제실 가문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카라칼라는 결국 스스로 손을 들었다. 두 형제의 화해를 시도하던 모친 율리아 도므나의 품에 몸을 숨긴 게타를, 그는 검으로 목을 찔러 직접 살해한 것이다. 이후 그는 근위대와 원로원 앞에서 동생이 음모를 꾸몄다는 핑계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카라칼라는 곧바로 원로원에 게타에 대한 '기억 말살(damnatio memoriae)'을 선포하게 했다. 로마의 기념물에서 동생의 이름은 지워졌고, 황제 앞에서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자는 혹독한 고문에 처해졌다. 그의 존재를 암시하는 모든 것이 철저히 지워졌다. 이어서 카라칼라는 게타의 친우, 친족, 지지자, 그리고 잠재적 경쟁자들을 겨냥한 조직적인 숙청에 착수했는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 희생자가 약 2만 명에 달했으며 여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손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통치

내정 정책

카라칼라의 내정은 모친과 아버지 시절 법률가들의 영향을 받아, 대체로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노선을 계승하되 더 평등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 다만 그의 개인적 역할이 어디까지였는지는 특정하기 어려운데, 네로나 콤모두스 시대처럼 좋은 정책은 참모들에게, 나쁜 행위는 황제 자신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율리아 도므나가 내정과 행정을 주도하고, 아들에게 전쟁 지휘를 맡기는 구도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동일시

카라칼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깊이 숭배하여 스스로를 '새로운 알렉산드로스'라 칭하며 마케도니아의 정복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무덤을 참배하기도 했다. 아마도 아버지 세베루스를 수행하며 이미 방문한 적이 있었을 미라가 안치된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제복을 관 위에 덮고 떠난 뒤 영구히 봉인하게 했다.

또한 그는 고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병사들처럼 무장시킨 1만 6,000명 규모의 부대, 이른바 '알렉산드로스의 팔랑크스'를 창설하고, 젊은 스파르타인들로 구성된 '피타나 라코니아 대대'도 조직했다. 파르티아, 즉 '새로운 페르시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어 오스로에네를 병합하기도 했다. 동방 원정 기간 동안 그는 직접 마케도니아식 복장을 하고, 장군들에게 알렉산드로스 휘하 장군들의 이름을 사용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알렉산드리아 학살

215년 12월부터 216년 4월까지 이어진 카라칼라의 알렉산드리아 방문은,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성대한 환영을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 주민들에 대한 여러 차례의 학살로 끝났다. 그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 현지 주민들이 동생 게타를 선호한다고 공공연히 밝힌 데서 비롯되었거나, 황제 도착 전에 발생한 소요 사태가 원인일 수 있다. 또한 신경질적으로 예민했던 황제는 알렉산드로스와의 동일시, 혹은 작은 키 때문에 시민들의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학살은 황제를 알현하러 온 종교 사절단을 향한 것이었다. 213년 이후 어떠한 사절단의 접견도 금지했던 카라칼라는 이들을 알렉산드리아의 사절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헤로디아노스에 따르면, 황제는 이어서 군대를 도시에 풀어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게 했는데, 그 참상이 '피바람이 광장을 가로질러 그토록 광활한 나일강의 어귀마저 붉게 물들이는'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두 번째 학살은 황제의 조각상을 기한 내에 납품하지 못한 도시의 소상공인들을 겨냥한 것이었고, 세 번째 학살은 216년 봄, 알렉산드로스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를 본뜬 복장을 한 카라칼라를 조롱한 알렉산드리아 청년들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여기에 215년에는 이집트인들의 도시 대량 추방을 명하는 칙령까지 반포되었다.

학살의 희생자 수는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역사가에 따라 약 1만 5,000명이라는 추산부터 10만 명이라는 설까지 제시되었다. 학살은 알렉산드리아 시내에만 그치지 않고 교외, 인근 마을, 나일 삼각주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도시의 엘리트와 지식인층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수많은 기념물과 건축물이 파괴되었다. 그 결과 도시의 역사와 기억은 단절되어, 300년경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 위치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과거의 영광을 잃고, 제국 각지로 곡물을 실어 나르는 한낱 항구 도시로 전락했다. 언어 면에서도 변화가 나타나, 이집트 민간 문자(데모틱, 훗날의 콥트어)가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 전역에서 우세해지고 그리스어의 지위가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스어가 다시 부흥하는 것은 4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국경 방어

카라칼라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군대와 함께 전선에서 보냈다. 213년부터 그는 라인강과 다뉴브강 유역에서 알레만니족을 상대로 여러 차례 원정을 감행했다. 마인강에서 승리를 거둔 그는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라는 호칭을 얻었고, 서부 국경에 약 20년간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이 평화는 세베루스 알렉산드루스 황제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216년에는 파르티아 왕국과의 전쟁에 돌입하고 아르메니아로 군대를 파견했다. 원정 중 카라칼라는 파르티아 왕 아르타반의 딸과의 혼인을 청했고, 이를 받아들여 전군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해 제국의 혼례를 올린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수도 크테시폰 근교에서 민간인과 군인이 함께 모여 축제를 벌이던 때, 카라칼라는 신호를 보냈고 알렉산드리아의 참극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로마 병사들이 일제히 파르티아인들에게 달려들어 대학살을 벌인 것이다. 파르티아 왕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오직 로마의 배신에 대한 복수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안토니누스 칙령: 수백 년 차별의 종식

212년, 카라칼라는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을 통해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새로운 시민들은 자신들의 기존 법과 관습을 원하는 한 계속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 조치가 로마 사법을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여러 사례로 확인된다.

  • 212년 이후 이집트에서 발굴된 수많은 문서들은 새로이 로마 시민이 된 사람들이 이집트·그리스의 전통을 그대로 지켜 왔음을 보여준다.
  • 고르디아누스 3세(238~244년) 치세의 비문은 지역 관습에 현지법으로서의 효력을 명시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 유스티니아누스는 535~536년경 메소포타미아에 근친혼 관습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지적하면서, 로마법이 근친상간으로 규정하는 이 혼례가 29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에 의해 강력한 문구로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고 비판했다.

이 칙령의 반포 이유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고대 저술가들이 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세기 후에는 보편적 시민권이 너무나 당연한 원리가 되어,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조차 해당 조문을 다시 수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현재 우리가 가진 유일한 사본은 기센 파피루스(Giessen Papyrus)로, "제국 영토 내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이 칙령의 배경으로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거론된다.

  • 황제의 정적이었던 디오 카시우스는, 시민이 된 페레그리니(속민)들이 이제 로마 시민만이 부담하던 상속세를 내야 하며, 카라칼라가 바로 그 세율을 5%에서 10%로 인상했다고 주장했다.
  • 법학자 울피아누스는 신분이 더 균일해진 제국에서는 관청과 법원의 업무가 수월해진다고 보았다. 실제로 법률가와 공증인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를 충족하기 위해 베이루트의 법학교가 정비되었다.
  • 기센 파피루스를 근거로 하는 일부 역사가들은, 카라칼라가 로마의 신들 앞에서 신앙의 일체성을 이루고자 했다고 해석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진심으로 흠모했던 황제는 통일된 세계를 다스리는 것을 염원했을지도 모른다.

칙령의 결과로 신분 등록에서 부족(tripes) 표기는 폐지되었고, 모든 새 시민에게 '트리아 노미나(tria nomina)', 즉 로마식 3부 성명이 부여되었다.

한편 이 칙령을 '보편적 시민권'의 창설 의지로 보는 것은 근거가 없을뿐더러 시대착오적 해석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이 칙령은 21세기에 이르러 한 나라의 모든 주민에게 정치적 권리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의 대표적 선례로 계속 인용되고 있다.

죽음

카라칼라는 통치 후반에 병사들 외에는 거의 지지받지 못하는 전형적인 군사 독재자로 전락했다. 에데사에서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행군하던 중, 그는 217년 4월 8일 하란 근교에서 마르티알리스의 검격에 암살당했다. 근위대장 마크리누스가 배후에 있었을 것으로 강하게 의심되며, 실제로 그가 암살을 지시했을 개연성이 높다. 마크리누스는 이후 황제의 자리를 계승했다.

카라칼라의 시신은 화장되었거나(혹은 조촐하게 매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장례가 은밀하게 치러졌으며, 유해는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이름의 변천

  • 188년 — 출생: 루키우스 세프티미우스 바시아누스
  • 196년 — 아버지에 의해 카이사르로 책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카이사르
  • 198년 — 아버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로 추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 198년 — 아버지의 파르티아 전승 이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파르티쿠스 막시무스
  • 200년 — '펠릭스(Felix)' 호칭 추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 파르티쿠스 막시무스
  • 209년 — 아버지의 칼레도니아 전승 이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 파르티쿠스 막시무스 브리타니쿠스 막시무스
  • 211년 — 즉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 파르티쿠스 막시무스 브리타니쿠스 막시무스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 217년 — 서거 당시 최종 칭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 파르티쿠스 막시무스 브리타니쿠스 막시무스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폰티펙스 막시무스, 호민관 권한 20회, 임페라토르 3회, 집정관 4회,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