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콤모두스: '오현제' 시대를 끝낸 황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아우구스투스(161년 8월 31일 ~ 192년 12월 31일)는 서기 180년부터 192년까지 재위한 로마 황제다.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잔혹하고 피에 굶주린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죽음은 '5현제(五賢帝)' 시대의 막을 내리고, 193년 '네 황제의 해'로 알려진 내전과 혼란의 서막을 열었다.
출생과 혈통: '포르피로게니투스'의 비극
콤모두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작은 파우스티나 사이의 아들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증손이다. 그는 안토니누스 왕조에서 유일하게 '포르피로게니투스(자주색 방에서 태어난 자)', 즉 제위 계승 중에 황궁에서 태어난 황제였다. 참고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시 어려서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입양되었기에 포르피로게니투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출생을 둘러싼 추문은 끊이지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등 로마 사료들은 그의 어머니 파우스티나가 검투사, 선원, 판토마임 배우 등과 불륜을 저질렀으며, 콤모두스가 실은 검투사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전한다. 이러한 악평은 콤모두스의 끔찍한 평판과 황실 부부의 검투 경기 광기가 빚어낸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권력의 길: 조기 승계와 단독 통치
콤모두스는 166년 카이사르(황태자)에 책봉되었고, 175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 이후 177년 1월 1일 아우구스투스(공동 황제)로 승격되어 부황과 동등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177년 크리스피나와 결혼했으나, 188년 그녀를 카프리 섬으로 유배 보낸 뒤 191년 살해했다.
180년 도나우 전선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하자, 콤모두스는 군대의 환영과 원로원의 승인 아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는 진행 중이던 마르코만 전쟁을 마무리 짓고 로마로 귀환했는데, 당대 사가들은 이를 향락에 빠진 젊은 황제가 평화를 그르친 무책임한 결정이라 혹평했다. 하지만 현대 연구에 따르면 국방은 방치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통성이 약한 황제가 수도에서 권력 기반을 다지려 한 정치적 행보로 해석된다.
원로원과의 갈등: 숙청과 불신의 악순환
초기에는 원로원과 양호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182년 친누이 루킬라가 연루된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대대적인 정치적 숙청이 이어졌고, 황제와 원로원 사이에는 깊은 불신의 골이 패였다. 이는 재위 말기 3년간 절정에 달했다.
고립된 콤모두스는 소수의 측근과 총애하는 자유민들에게 의존했다. 먼저 근위대장 티기디우스 페렌니스를 신임했으나 그도 음모에 휘말려 몰락했고(185년), 이후 185~189년에는 자유민 클레안데르가 실세로 군림했다. 원로원 귀족들은 거듭된 음모로 맞섰으나 모두 실패했고, 갈등만 심화되었다.
민중과 군대에 기댄 포퓰리즘과 광기
콤모두스는 원로원을 배제하고 민중(플레브스)과 군대를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막대한 재정을 들여 금전 살포와 곡물 배급을 벌였고, 189년 곡물 부족 사태(음모설도 존재) 때 군중이 안노나 청장 파피리우스 디오니시우스와 근위대장 클레안데르를 찢어 죽이도록 방관했다. 그는 최고가격령을 내려 물가를 잡으려 했고, 이집트산에 의존하던 곡물 공급선을 북아프리카산으로 다변화하려 했다. 한편 안토니누스 역병의 재유행으로 로마는 큰 타격을 입었다.
대외적으로는 180년 마르코만니와 강화 조약을 맺어 곡물, 무기, 병력을 조공받는 조건으로 장기전을 매듭지었다.
신격화와 광기: 헤라클레스로 자처하다
재위 말기 콤모두스의 광기는 제도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모든 관청과 달력의 달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꿨으며, 로마 자체를 '콜로니아 루키아 안니아 콤모디아나'로 개명했다. 원로원에게는 모독이었으나, 검투사 복장으로 콜로세움에 내려가 맹수와 검투사를 연거푸 쓰러뜨리는 모습은 민중의 열광을 샀다. 그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고, 동전 초상에 사자 가죽과 곤봉을 든 헤라클레스로 자신을 형상화했다.
최후: 욕실에서의 교살
말년은 측근 숙청으로 점철되었다. 콤모두스는 측근들이 자신을 찬탈할까 봐 두려워했고, 페르티낙스 같은 인물은 도시 경찰청장까지 오르며 총애를 받았다. 독살 시도가 실패한 뒤, 192년 12월 31일 검술 교사였던 노예 나르키수스가 욕실에서 그를 교살했다. 이 배후에는 근위대장 라에투스, 시종장 에클레투스, 애첩 마르키아가 있었다. 이들은 실각 위기를 느껴 선수를 친 것이었다.
사후 평가와 제국의 운명
원로원은 콤모두스를 신격화하지 않고, 네로·도미티아누스처럼 '기억 말살형(담나티오 메모리아에)'을 내렸다. 하지만 민중과 군대의 지지를 의식한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을 압박해 콤모두스를 신격화시키고, 스스로를 '콤모두스의 형제'로 칭하며 안토니누스 왕조의 적통을 주장했다.
즉위한 페르티낙스는 노령의 명망가였으나 몇 달 만에 암살당했고, 제국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근위대 매수), 페스케니우스 니게르(동방),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브리타니아), 세프티미우스 세베루스(판노니아)가 각축하는 내전으로 치달았다. 최종 승자는 세베루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