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페르디난드 마젤란,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를 이끈 항해사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누구인가

페르난두 드 마갈량이스(포르투갈어: Fernão de Magalhães), 흔히 '마젤란'으로 알려진 이 인물은 1480년 봄 포르투갈 세투발 근처의 작은 항구 도시 시네스에서 태어나, 1521년 4월 27일 필리핀 막탄 섬에서 생을 마감한 포르투갈 출신 항해사이자 탐험가입니다. 그가 이끈 원정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구를 일주하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15세기 유럽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상식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많은 지도 제작자들이 이미 이를 알고 있었는데, 독일 뉘른베르크의 마르틴 베하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구본 중 하나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마젤란보다 앞서 지구 구형설을 주장하거나 적어도 그 진실에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은 남아 있었습니다.

한편 당시 유럽은 이 지역에서 구하기 어려운 향신료에 대한 열망을 키우고 있었고, 이는 지리학자·탐험가·상인들의 관심을 한껏 자극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가진 항해사 마젤란은 젊은 시절 알부케르크 함대에서 복무하며 이미 가까이 접했던 향신료 제도(몰루카 제도)에 서쪽 항로를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포르투갈 함대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이미 발견한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마젤란이 '발견'이라 불릴 원정을 떠나기 훨씬 전부터, 귀한 향신료의 산지인 몰루카 제도는 마젤란의 개인적인 친구이기도 했던 프란시스쿠 세랑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마젤란이 포르투갈 국왕에게 이 제도들로 가는 새로운 항로 개척을 제안했을 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향신료 무역은 이미 포르투갈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고, 제도 또한 이미 그들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설득력을 지녔던 마젤란은 당시 겨우 18세였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직접 손을 뻗습니다. 이 도전의 본질은 단순한 섬 발견이 아니라,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정해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역 경계를 정확히 그려내는 데 필요한 정밀한 지도 제작에 있었습니다.

초기 항해의 나날

마젤란이 처음 바다에 나선 것은 25세였던 1505년입니다. 그는 프란시스코 드 알메이다를 포르투갈 부왕으로 임명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인도로 파견되었습니다. 이 항해에서 마젤란은 첫 전투 경험을 쌓게 됩니다. 3년 전 바스쿠 다 가마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현지 왕이 알메이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알메이다의 군대는 오늘날 탄자니아에 해당하는 킬와의 수도를 공격해 정복한 것입니다.

1505년 마젤란은 동인도로 건너가 향신료 제도를 찾는 원정에 합류했습니다. 1509년 2월에는 이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세력 약화를 상징하게 된 디우 해전에 참전했고, 1510년에는 장교로 승진합니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허가 없이 배를 너무 동쪽으로 몰았다는 이유로 계급을 박탈당했고, 1512년 포르투갈로 강제 귀국해야 했습니다.

1513년에는 모로코로 파견되어 아자모르 전투에 참여했으나, 전투 중 무릎에 중상을 입습니다. 허가 없이 자리를 떠난 일로 알메이다의 신임을 잃었고, 무어인과의 불법 무역 혐의까지 받게 됩니다. 이 혐의는 곧 기각되었지만, 마젤란은 새 국왕 마누엘 1세의 궁정에서 외면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왕은 그의 연금 인상을 거부했고, 1514년 5월 15일부로 그의 복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마젤란은 스페인 궁정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세계일주 원정의 준비

마젤란은 먼저 포르투갈 국왕에게 서쪽 항로를 통해 향신료 제도(몰루카 제도)로 가는 원정을 이끌겠다고 제안했지만, 포르투갈은 거절했습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르면 이 제도들은 카스티야 왕관에 배정된 지리적 영역 안에 있었고, 스페인과의 전쟁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517년 10월 세비야에서 마젤란은 무역청(Casa de Contratación)의 책임자 후안 데 아란다와 접촉합니다. 이후 동료 루이 파헤이루가 합류하고, 아란다의 지원 덕분에 두 사람은 막 스페인에 도착한 군주 카를로스 1세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제안은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향신료 항로를 열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매력적으로 보였고, 왕실에 부와 명예를 안겨줄 행보였습니다.

1518년 3월 22일, 국왕은 마젤란과 파헤이루를 선장으로 임명하여 향신료 제도 탐색을 명령하며 다음과 같은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 발견 항로에 대한 10년간의 독점권
  • 만나게 될 땅과 섬들의 총독 직위 및 순수익의 5%
  • 원정 수익의 5분의 1
  • 향후 원정에서 1,000두카트를 공제하고 초과분에 대해서만 5%를 납부할 권리
  • 가장 부유한 여섯 섬을 제외한 각자의 섬 하나를 분양받을 권리(여섯 섬 중에서는 15분의 1만 수령)

원정 비용은 왕실이 부담하기로 하고, 2년 치 보급품을 실은 다섯 척의 배가 제공되었습니다. 이 제안은 1505년 토로 회의 이래 향신료 항로 발견을 목표로 삼아온 왕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그 이전 탐험가들의 항해담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준비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자금 부족, 원정대 체포를 시도하는 포르투갈 국왕의 방해, 파헤이루와 마젤란 사이의 갈등 등 끊임없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마젤란의 집요함 덕분에 원정은 빛을 보게 되는데,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중개로 상인 크리스토발 데 아로로부터 자금의 5분의 1을 조달받을 수 있었습니다.

15세기 포르투갈에는 탐험가와 지리학자가 너무나 많아서, 마젤란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처럼 모험을 펼치기 위한 자금을 찾아 망국길에 올라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커다란 문제가 드러납니다. 포르투갈 출신인 마젤란은 스페인 선원들과 스페인인 선장들로 구성된 함대(콜럼버스는 3척, 마젤란은 5척)를 이끌어야 했다는 점입니다. 갈등은 예견된 일이었고, 마젤란의 경우 그것이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출항, 그리고 시작된 갈등

1519년 9월 20일, 원정대는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를 떠났습니다. 약 240명의 선원을 태운 다섯 척의 배, 즉 마젤란이 직접 지휘하는 트리니다드호, 빅토리아호, 산안토니오호, 콘셉시온호, 산티아고호였습니다. 이때 마젤란의 나이는 39세였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은 이미 발견된 상태였지만, 콜럼버스가 마젤란과 동시대 인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아메리카(당시에는 서인도라고 불렸음)가 발견될 당시 마젤란은 겨우 12살이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브라질 지역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이미 아메리카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원정대의 다섯 명의 선장 중 적어도 세 명은 마젤란과 같은 견해를 공유하지 않았고, 일부는 그를 제거하려는 야욕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이 원정에는 이탈리아인 안토니오 피가페타가 동행하여 항해 일기를 남깁니다. 우리가 반란자들에 대한 정보는 물론 원정의 전체 기록을 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18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카나리아 제도에 잠시 머문 뒤, 반란의 주모자인 스페인 출신 후안 데 카르타헤나가 포로로 잡힙니다. 넉 달이 지난 12월, 함대는 브라질 연안에 도착합니다. 함대에는 스페인 깃발이 걸려 있었고 브라질은 포르투갈 식민지였기 때문에, 마젤란은 오늘날 리우데자네이루에 해당하는 해역에 정박하기로 결정합니다. 보급을 마친 함대는 남아메리카를 돌아가기 위해 남쪽으로 항해를 이어갑니다. 1519년 12월, 남쪽으로 갈수록 추위는 심해졌고, 마젤란은 파타고니아(아르헨티나)에서 월동하기로 합니다. 그가 머무는 동안 또 다른 반란이 조직됩니다. 빅토리아호에 포로로 수감되어 있던 카르타헤나를 그 배의 선장 루이스 데 멘도사가 풀어준 것입니다. 마젤란은 다시금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해, 카르타헤나는 파타고니아에 버려지고 또 다른 반란 선장 가스파르 데 케사다는 처형됩니다.

반란과 난파

1520년 3월 31일, 함대는 자연항인 산훌리안 항에 정박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부활절 반란이 일어나고, 마젤란은 이를 진압하지만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북반구의 여름(현지의 겨울) 동안 마젤란은 함대 중 한 척을 정찰에 보내 아메리카 서쪽, 태평양으로 통하는 유명한 해협을 찾게 합니다. 불행히도 산티아고호는 5월 좌초되고 만습니다. 세 달 후 마젤란은 남은 네 척의 배와 함께 다시 남쪽으로 향합니다.

10월, 마젤란은 마침내 서쪽으로 통하는 해협을 발견하고 이를 '만성절 해협'이라 이름 붙입니다. 위협적인 절벽에 둘러싸인 피오르의 미로, 음침한 물살과 암초와 얕은 여울 사이를 통과하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렸습니다. 이 해협을 지나는 동안 선원들이 해안에서 수많은 불꽃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 해안은 '불의 땅(Tierra del Fuego)', 즉 티에라델푸에고라 불리게 됩니다. 이 해협은 훗날 1541년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에 의해 그의 공로를 기려 '마젤란 해협'으로 명명됩니다. 한 척이 좌초했고, 또 다른 배 산안토니오호는 반란의 여파로 이탈해 식량의 상당 부분을 실은 채 세비야로 돌아가 버립니다.

태평양 횡단과 기아의 나날

마젤란의 시대에 지구의 둘레는 아직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에라토스테네스가 거의 18세기 전에 계산해 놓았음에도 말입니다. 마젤란은 지구를 실제보다 훨씬 작게 믿었고, 해협을 통과하면 며칠 안에 향신료 제도에 닿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태평양의 광활함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최대한 직선으로 횡단하는 동안, 상륙조차 할 수 없었던 두 개의 환초—'상어의 섬들(las islas de los Tiburones)'이라 불린 곳, 오늘날 키리바시의 캐롤라인 섬—을 제외하면 남해에 흩어진 수많은 섬 하나에도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물은 더 이상 마실 수 없게 되고,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빵조차 떨어지자 선원들은 쥐를 잡아먹으며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과일도 비타민 C도 없이, 괴혈병은 승무원들을 집어삼켰습니다. 1521년 3월경, 넉 달 만에 그들은 괌에 도착해 신선한 과일을 포함한 보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필리핀으로 항해를 계속해 3월 28일 도착합니다.

그곳은 목가적인 풍경, 향신료, 알록달록한 새들, 그리고 저항 없이 개종을 받아들인 듯한 친절한 원주민들의 땅이었습니다(선교 역시 이 원정의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세부 맞은편의 작은 섬 막탄의 왕 라푸라푸는 하얀 침략자들에게 복속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마젤란은 화승총으로 무장한 60명의 스페인 병사가 자신들보다 열 배나 많은 맨몸의 원주민들을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맞섰습니다. 독화살이 쏟아졌고, 그중 하나가 마젤란을 꿰뚫었습니다. 그는 몇 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얕은 물속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빅토리아호의 귀환

함대의 지휘권은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에게 넘어갑니다. 출항 당시 260명이던 선원은 겨우 100명 남짓으로, 세 척의 함대를 운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벌레가 콘셉시온호의 선체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배는 불태워집니다. 남은 두 척의 배는 5월 초 필리핀을 떠나, 6개월 후 유명한 향신료 제도에 도착합니다.

11월, 그들은 몰루카 제도에 닿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이미 15년 전부터 포르투갈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정말 몰랐던 것일까요?). 선원들은 남은 두 척의 배에 향신료를 가득 실습니다. 그런데 빅토리아호가 항구를 떠나려는 순간, 트리니다드호가 물을 머금고 기울어져 버립니다. 수리를 위해 남을 수밖에 없었던 트리니다드호는 4개월 후 출항하지만, 카르발류가 지휘하는 53명의 승무원을 태운 이 배는 포르투갈 선원들에게 나포되고, 그들이 발견한 것은 기력을 잃은 스무 명의 선원뿐이었습니다.

한편 엘카노가 지휘하는 60명의 빅토리아호는 1521년 12월 21일 티도레 섬을 떠나 인도양을 건너 희망봉을 돌아 스페인에 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살아남은 선원은 단 18명, 그중에는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준 안토니오 피가페타도 있었습니다. 빅토리아호는 지구를 완전히 일주한 최초의 배가 되었습니다. 모든 비용을 공제하고도, 선창 바닥에 실려 돌아온 향신료는 42만 8천 마라베디라는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로부터 58년이 지난 뒤에야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두 번째 세계일주에 성공합니다.

16세기에 살았던 사람의 눈으로 이 원정의 가능성, 난관, 그리고 영웅적 정신을 헤아려 볼 때, 마젤란 원정이 남긴 의미는 더욱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