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수아 1세: 프랑스 르네상스를 이끈 왕

프랑수아 1세 개요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1494~1547)는 1515년 랭스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1547년 사망할 때까지 재위했다. 그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상징적인 군주로 평가받으며, 그의 치세 동안 프랑스의 예술과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청년기와 교육

나바르의 마르그리트(1492~1549)의 남동생인 프랑수아 1세는 카페 왕조의 발루아-앙굴렘 가문 출신이다. 1494년 9월 12일 코냑(샤랑트 주)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대부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에서 따왔다. 아버지 샤를 드 앙굴렘(1459~1496)과 어머니 루이즈 드 사부아(1476~1531)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선왕 루이 12세의 사촌이자 밀라노 공작부인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손자였다.

1515년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그는 인문주의 군주의 이미지를 지녔다. 그는 불사조를 문장으로 삼았으며, 'Nutrisco et extinguo(나는 불을 먹이고 끈다)'라는 모토를 사용했다. 그의 두 선대 왕인 샤를 8세와 루이 12세가 이탈리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당시 그곳에서 싹트던 예술적·문화적 운동을 프랑스에 온전히 이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 르네상스가 만개하게 된다.

이탈리아 원정 기간 동안 이탈리아 문화와 프랑스 문화가 접촉하면서 새로운 사상들이 프랑스에 유입되었고, 프랑수아가 교육받던 시기와 맞물렸다. 그의 스승들, 특히 라틴어 교사 데물랭과 크리스토프 드 롱괴유는 이탈리아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교육을 베풀었다. 어머니 루이즈 드 사부아 역시 르네상스 예술에 큰 관심을 두고 아들에게 그 열정을 전수했다. 그가 본격적인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그 어떤 선대 왕보다도 이 지적 운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교육받았음은 분명하다.

르네상스 군주로서의 면모

예술가 후원

프랑수아 1세가 즉위할 무렵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상은 이미 프랑스에 퍼져 있었고, 왕은 이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예술가들에게 의뢰했으며, 당대 최고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불러들였다. 안드레아 델 사르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이 그를 위해 일했다. 프랑수아 1세는 노년의 다 빈치를 "나의 아버지"라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보였고, 앙부아즈 성 근처 클로 뤼세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다 빈치는 궁정 축제 기획, 의상 제작, 다양한 프로젝트 연구 등을 맡았으며, 전설에 따르면 왕의 품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금세공인 첼리니, 화가 로소와 프리마티치오 등이 왕실 성들의 수많은 장식 작업을 맡았다. 프랑수아 1세는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라파엘로 등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프랑스로 가져오기 위해 많은 대리인을 고용했다. 프랑스 왕실 소장품 컬렉션,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의 기반이 된 수집이 본격화된 것도 그의 치세 때였다.

문필가로서의 왕

프랑수아 1세는 문필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그는 왕립 도서관을 확장하고 인문주의자 기욤 뷔데를 관장으로 임명해 장서 확충을 맡겼다. 지식 보급을 위해 도서관 이용을 개방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문학과 미술을 장려하고 학자들을 보호하여 '문학의 아버지'라 불릴 자격을 얻었다.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당시 왕립 강좌)와 왕립 인쇄소를 설립했다. 몇몇 시와 서간문을 남겼으며, 이들이 출간되기도 했다.

건축가로서의 왕

프랑수아 1세는 끊임없이 건물을 짓는 건축 군주였다. 그는 선대부터 이어오던 앙부아즈 성 공사를 계속했고 블루아 성을 복원했다. 치세 초반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샹보르 성 건축을 시작했다.

어두운 중세 요새였던 루브르 궁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으며, 파리 시청사 신축을 지원해 건축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마드리드 성(현존하지 않음)을 짓고 생제르맹앙레 성을 재건했다. 그의 최대 프로젝트는 퐁텐블로 성 확장 공사로, 이곳은 곧 그가 가장 아끼는 거처가 되었다. 야심 찬 모든 왕실 건축 사업은 내외부의 호화로운 장식으로 완성되었다.

대외 정책: 영광과 좌절

군사·정치적으로 프랑수아 1세의 치세는 덜 화려했다. 그에게는 두 명의 강적,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왕 카를 5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8세가 있었다.

이탈리아 전쟁 제1기 (1515~1526)

1515년 사촌 루이 12세를 계승한 그는 루이 12세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클로드 드 프랑스(레인클로드 자두의 이름 유래)를 통해 밀라노 공국 계승권을 주장했다. 즉위하자마자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 공국으로 진격했다. 이 지역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대는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대패했고, 밀라노 공국은 프랑스 수중에 떨어졌다. 이 승리로 프랑수아 1세는 큰 명성을 얻었으나, 실제 전투 결과는 보이는 것보다 불확실했다. 그는 스위스와 프리부르 조약(영구 평화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

1516년 교황 레오 10세와 비테르보 조약과 볼로냐 협약을, 1519년 카를 5세와 누아용 조약을 맺으며 유럽의 평화를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위험은 다가오고 있었다. 카를 5세는 1506년부터 부르고뉴 네덜란드(현 베네룩스)와 프랑슈콩테를 보유하고 있었고, 할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로부터 물려받은 부르고뉴 공국도 주장했다. 1516년에는 어머니 후아나 1세로부터 이베리아 반도와 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속받았다.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독일 황제위까지 이어받아 프랑스를 포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황제 선거에 입후보했다.

하지만 1520년 카를 5세는 막시밀리안 1세의 영지를 상속받았고, 대은행가 야코프 푸거의 막대한 자금 지원으로 선제후들을 매수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당선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즉각 선전포고했으나 연이은 좌절을 겪었다. 1521년 슈발리에 바야르가 카를 5세의 독일군에 포위된 메지에르를 방어했고, 1522년 오데 드 푸아의 비코카 전투 패배, 보니베의 비아그라소 전투 패배와 바야르의 전사 끝에,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 본인이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이것은 그의 최대 치욕이었다. 프랑스군은 "용맹의 기적"을 보였으나, 왕은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잃었다. 명예만 남았다"고 썼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탈리아 기사 체사레 에르콜라니 데 포를리에 의해 생포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루이즈 드 사부아의 고해 신부와 인척 관계였다.

프랑수아 1세는 마드리드에서 1년간 억류되었으며, 장남 프랑수아(도팽)와 차남 앙리(훗날 앙리 2세)를 4년간 인질로 내주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1526년 마드리드 조약에서 부르고뉴, 플랑드르, 밀라노 공국을 카를 5세에게 양도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강요된 조약이라며 이를 부인했다. 왕자들은 200만 에퀴의 거액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으며, 부르고뉴 지방이 프랑스 분리를 거부해 전쟁은 거의 즉시 재개되었다.

북아메리카 탐험과 누벨프랑스

프랑수아 1세는 1524년 리옹에 정착한 피렌체 상인들과 디에프의 선주 장 앙고를 지원해 조반니 다 베라차노의 북아메리카 탐험을 후원했다. 베라차노는 뉴펀들랜드를 탐사하고 누벨 앙굴렘(훗날 뉴암스테르담, 현재 뉴욕)을 세우며 왕가에 경의를 표했다. 1534년에는 자크 카르티에를 퀘벡의 세인트로렌스 강으로 보내 "금과 부가 풍부하다는 섬과 땅"을 찾게 했다. 이것이 누벨프랑스의 시작이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협력

프랑수아 1세는 공동의 적 카를 5세를 견제하기 위해 슐레이만 1세(대왕)가 통치하는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았다. 프랑스와 오스만 사이에 정식 동맹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으나, 긴밀한 협력으로 지중해에서 스페인 함대를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주목할 점은 프랑수아 1세가 술탄과 직접 협상하지 않고 중개 외교관을 활용했다는 점인데, 이는 단순한 전령이 아닌 협상권을 가진 근대적 외교관의 초기 사례다. 이 외교관은 예방 차원에서 이스탄불에서 1년간 억류되기도 했다.

1535년 프랑스는 유럽 최초로 오스만 제국에서 '카피튈라시옹(자치권)'으로 알려진 상업 특권을 획득했다. 프랑스 선박은 백합기(플뢰르드리스)를 달고 오스만 영해를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었고, 타국 선박은 프랑스 국기를 달고 프랑스 영사의 보호를 받아야만 교역할 수 있었다. 또한 이스탄불 갈라타 지구에 대사관 예배당을 둘 권리를 얻었는데, 이는 훗날 생브누아 고등학교로 발전했다. 이 특권은 오스만 제국 내 가톨릭 신자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도 보장했다.

이탈리아 전쟁 제2기 (1536~1544)

프랑수아 1세는 계속된 좌절을 겪었다. 나폴리 원정에서 군대 대부분을 잃고 1529년 캉브레 조약(여성들의 평화)을 체결했다. 1530년 8월 7일 카를 5세의 누이 엘레오노르 데 압스부르(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 미망인)와 재혼했다.

1535년 다시 이탈리아로 진격해 사보이 공작 카를 3세로부터 사보이 공국을 정복했고, 카를 5세가 프로방스를 침공했으나 몽모랑시 원수에 의해 격퇴되었다. 1538년 니스에서 10년 휴전 조약을 맺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카를 5세가 약속과 달리 왕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밀라노 공국 투여를 거부하자 1542년 제4차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여러 차례 성공 끝에 1544년 크레피 조약으로 최종 강화했으며, 밀라노 공국은 왕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에게 귀속되기로 했다.

잦은 좌절에도 프랑수아 1세는 고귀하고 기사도적인 품성으로 라이벌 카를 5세보다 우위에 섰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기술 혁신을 활용하지 못한 형편없는 전략가였다. 마리냐노 전투가 대표적이다. 유럽 최고 수준의 포병대를 기병대 뒤에 배치해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내정: 권력 집중과 재정 악화

젊은 앙리 왕자가 궁정에서 총희 안 드 피슬뢰에 대항하는 반대파를 형성했다. (원문 중복 제거)

왕이 화려한 성들을 짓는 동안 국가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말년 루이 12세조차 사치스러운 프랑수아를 걱정했을 정도였다. 장인 루이 12세는 봉건 세력을 억제하고 재정이 튼튼한 나라를 물려주었으나, 프랑수아 1세는 왕권 강화에 성공하면서도 동시에 국가 경제를 악화시켰다.

총신들과 왕권 강화

프랑수아 1세 치세는 왕권이 강화되어 훗날 루이 14세가 완성할 절대왕정의 기초를 닦은 시기였다. 파리에 재건한 루브르 궁을 거점으로 한 궁정이 권력의 진정한 중심이 되었고, 왕은 사법·행정·재정 기구의 최종 결정권자로서 총신·대신·고문관을 임면했다. 치세 초반에는 선대 신하들(라 팔리스, 라 트레무아유, 오데 드 푸아)을 중용했다. 어머니 루이즈 드 사부아는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왕의 비밀 회의에 참여하고 두 차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1541년까지 몽모랑시가 왕실 침실 시종장(첫째 신하)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종교 정책과 개신교 탄압

종교개혁 사상이 프랑스에 퍼져나가자, 프랑수아 1세는 누이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영향으로 복음주의에 우호적이면서도 가톨릭과 결별하지 않는 관용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1534년 10월 '플라카르 사건(반가톨릭 벽보 사건)'이 발생하자 왕권이 모독당했다고 판단, 개신교도 탄압을 개시하며 프랑스 종교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통설과 달리 탄압이 플라카르 사건에 대한 즉각적 반응만은 아니었다. 파리 고등법원 형사 기록(72쪽)에 따르면, 사건 두 달 전인 1534년 8월부터 9월 15일까지 이미 왕은 본아방튀르 토마생을 위원장으로 하는 종교재판 위원회를 설치해 개혁파를 기소했다. 이 위원회는 1533년 9월 19일 아를에서 발급된 왕의 특허장에 근거해 여러 건의 사형 선고 등을 내렸다. 기록은 안타깝게도 마지막 20장이 뜯겨 나갔으며(나바르 왕비의 측근 연루 때문으로 추정), 원본은 소실되었다. 이 위원회가 파견되어 활동한 곳이 바로 왕의 "착한 여동생", "귀여운 여동생"이라 부르던 마르그리트가 알랑송 공작부인으로 있던 알랑송이었다. 프랑수아 1세는 지방 사법권이 너무 관대하다고 판단해 이를 찬탈한 셈이다.

재정 정책과 매관매직의 시작

건축 사업은 막대한 자금을 삼켰고,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전쟁은 천문학적 비용을 요구했다. 이를 메우기 위해 왕은 세금을 대폭 인상했다: 농민이 내는 탈레(직접세)는 2배 이상, 소금세인 가벨은 3배로 올랐다. 왕관 보석을 처분하고 왕실 영지를 매각해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왕은 관직과 공직을 매각해 현금을 확보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남용하지는 않았으나, 이 제도는 나중에 갈수록 확대되어 행정 효율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중앙 집권화는 진행되었으나 재정 기반은 흔들리게 된 것이다.

프랑스어의 공용어화와 호적 제도 도입

1539년 엔 주 빌레르코트레 성에서 프랑수아 1세는 '빌레르코트레 칙령'에 서명했다. 이로써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가 행정과 법률의 유일한 공용어가 되었다. 동 칙령은 성직자에게 출생 신고와 세례 대장 작성을 의무화했는데, 이는 프랑스 호적 제도의 공식적 시작이자 세계 최초로 친자 관계가 기록된 호적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1547년 3월 31일 랑부예 성에서 패혈증으로 사망했으며, 첫 번째 아내 브르타뉴 공작부인 클로드 드 프랑스와 함께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차남 앙리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묘는 프랑스 혁명 당시인 1793년 10월 파헤쳐졌다.

가족 관계

혼인

  • 1514년 5월 18일: 클로드 드 프랑스(1499~1524)와 결혼. 루이 12세와 브르타뉴의 안의 딸.
  • 1530년 8월 7일: 엘레오노르 데 압스부르(1498~1558)와 재혼. 카를 5세의 누이,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 미망인, 펠리페 1세와 후아나 1세의 딸.

자녀 (클로드 드 프랑스 소생)

  1. 루이즈 (1515~1517)
  2. 샤를로트 (1516~1524)
  3. 프랑수아 (1518~1536) - 제1도팽
  4. 앙리 2세 (1519~1559)
  5. 마들렌 (1520~1537) -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와 결혼
  6. 샤를 (1522~1545)
  7. 마르그리트 (1523~1574) - 1559년 사보이 공작 엠마누엘 필리베르와 결혼

서자

  1. 니콜라 데스투트빌, 빌쿠뱅 영주

상징: 불사조

프랑수아 1세의 문장인 불사조는 샹보르 성 곳곳과 르아브르 시 문장에 새겨져 있다. 불사조는 불을 다스리는 힘, 즉 인간과 세계를 다스리는 권능을 상징한다. 'Nutrisco et extinguo(나는 불을 먹이고 끈다)'라는 모토는 불에 대한 지배력을 의미한다. 이 신비로운 동물은 나쁜 불을 끄고 좋은 불을 지핀다고 믿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