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후 2시, 멈춘 잉글랜드 종대
오후 두 시. 다행히 네덜란드군은 움직이지 않았고, 프랑스 기병대의 끊임없는 돌격에 시달리던 잉글랜드 종대도 잠시 숨을 고르며 빠른 진격을 멈춘 상태였다.
“희망의 여신이 이제 프랑스 편에 섰다…”
왕의 결단, 리슐리외 공작의 작전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주위에는 참모진이 모여 있었다. 이제 전투의 제3국면, 곧 최종이자 결정적인 국면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왕실 참모부가 회의를 마무리하던 그때, 국왕의 부관인 리슐리외 공작이 전선에서 달려왔다. 누아유 원수가 전황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전투는 우리가 원한다면 이미 이긴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즉시 대포 4문을 잉글랜드 종대 앞으로 전진 배치해야 합니다.”
루이 15세는 이 의견에 즉각 찬동하며 리슐리외 공작의 계획을 승인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 보병 대부대가 적 종대의 우익을 괴롭히고 기병 돌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총반격 준비가 조용히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작센 원수와 비롱 공작의 ‘불복종’
늘 전장을 누비던 작센 원수는 아직 왕의 결정을 전해 듣지 못했지만, 새로운 작전 체계는 이미 가동 중이었다. 페이키니 공작(후의 숄른 공작)이 이 4문의 포문을 지휘하게 되었고, 포들은 잉글랜드 종대 정면에 배치되었다. 왕의 측근들은 각자 맡은 부대로 흩어졌고, 지안다르 기병, 소총병, 머스킷병, 근위 척탄기병들이 일제 합동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 우익에서는 안투앙에 배치된 병력으로 철수를 준비하라는 작센 원수의 명령이 아직 취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비롱 공작은 새로운 부대 움직임을 목격하고는 부하들의 후퇴를 중지시켰다.
“저는 불복종의 책임을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곧 모든 것이 바뀔 텐데, 왕께서는 그 순간 이를 윤허하실 것입니다. 작센 원수 역시 좋게 여기실 겁니다.”
작센 원수는 실제로 왕의 선택을 ‘좋게’ 여겼다. 거동조차 어려운 몸으로 그는 프랑스군 좌익으로 향하면서, 마주치는 무장 분견대들에게 노력을 통합하고 산발적이고 무질서한 소규모 교전에 병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재촉했다.
총반격 개시
이제 모든 프랑스군이 하나의 거대한 기동으로 결집하여, 확실히 약화되었으나 여전히 용기와 흔들림 없는 결속으로 무적처럼 보이는 잉글랜드군을 향한 최종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격은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곧 시작되었다.
“비롱 공작, 에스트레 백작, 크루아시 후작, 뢰벤달 백작 등 장군들이 이 새로운 공격을 이끌었다. 팡티에브르 기병 5개 중대는 크루아시와 그의 아들을 따랐다. 샤브리양, 브랑카스, 브리온, 오브테르, 쿠르텐 연대가 각 연대장의 인솔 아래 달려왔다. 노르망디 연대 소총병들은 종대의 최전열로 돌진해 첫 돌격에서 전사한 동료들의 원수를 갚았다. 아일랜드 부대가 그들을 지원했다. 종대는 정면과 양 측면에서 동시에 공격받았다…”
리슐리외 공작은 칼을 들고 직접 돌격을 이끌었다. 루이 15세 시대 전쟁사 연구자인 파졸 백작은 1884년 저술에서 이 장면을 두고 “그야말로 진정한 기사도였다. 에드워드 왕과 장 왕 시대의 화려한 마상시합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역사적 단축 평가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프랑스 기병대의 우아한 기동이 학살극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전투 돌격이라기보다 사열 행진을 연상시켰으리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결정타, 그리고 명예로운 후퇴
충돌은 처참했다. 몇 분 만에 잉글랜드 종대는 압도당했고, 방어선에 구멍이 뚫렸으며 수백 명의 병사가 양측에서 쓰러졌다. 사방에서 공격받은 컴벌런드 공작의 병사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포격에 놀라고 프랑스군이 조여오는 압박에 질식하다시피 한 앵글로-하노버 연합군은 빠르게 후퇴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소란 없이, 혼란 없이” 전장을 떠났다. 군기를 빼앗기지 않았고, 얼마 전 고생스럽게 건넜던 작은 도랑을 질서정연하게 내려가며 물러났다. 볼테르는 그들을 “명예롭게 패배한 자들”이라 불렀다. 그들은 전장에 최소 7,000명의 사상자와 2,000명의 포로를 남기고 떠났다.
프랑스군 쪽의 피해는 이러했다. “현장에서 전사한 병사와 보병 하사는 1,681명, 부상자는 3,282명이었다. 장교 중 전장에서 전사한 이는 53명뿐이었고, 323명은 부상으로 생명이 위태로웠다. 기병대는 약 1,800명을 잃었다.” 볼테르가 전하는 이 추산은 강하게 반박된 적이 없다.
‘사랑받는 루이’의 위대한 무공
1745년 5월 11일 봄날 오후, 폰트노아 전투는 끝났다. 이 전투는 즉시 ‘사랑받는 루이(Louis le Bien-Aimé)’ 치세의 위대한 무공으로 기록되었는데, 그날 하루 종일 국왕이 보여준 결단은 ‘전쟁의 예술’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승리가 오랫동안 불확신했기에 더욱 환호 속에 받아들여지는 동안, 국왕과 왕세자, 그리고 참모부 전원은 전통적인 축하 인사를 마친 뒤 양측의 부상자들을 살피러 나섰다. 말에 올려진 작센 원수는 루이 15세 앞에 나아가 외쳤다.
“폐하, 저는 이제 충분히 살았습니다. 저는 오늘 폐하께서 승리하시는 것만 보기 위해 살고 싶었습니다… 전쟁이 어떤 것인지 이제 아시겠지요.” 그리고 그는 국왕에게 바리 숲과 폰트노아 사이에 방어용 독립진지(레두트)를 설치하지 않은 실책을 고백했다.
완전한 승리의 원형, 그러나 남은 아쉬움
그럼에도 폰트노아 전투는 ‘완전한 승리’의 원형으로 보인다. 다만 적 좌익에 네덜란드군이 주둔하고 있었기에 프랑스군은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하지 못했다. 양측 모두 훌륭하게 싸웠지만, 인명과 물자 면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루이 15세의 은혜에 감사 인사를 하러 온 한 장교에게 왕세자가 다가갔을 때 돌아온 대답이 이를 잘 보여준다. 군주의 은총은 “복음의 은총과 같아… 앉은뱅이와 절름발이에게도 내린다”는 것이었다!
전장에서 보낸 승전보와 편지
루이 15세는 ‘자신의’ 승리에 황홀해하며, 적군이 붕괴하기 시작한 첫 순간부터 다음과 같은 메모를 적었다.
“폰트노아 전장에서, 5월 11일 오후 2시 반.
적은 오늘 아침 5시에 우리를 공격했다. 그들은 크게 패했다. 나는 잘 있고 아들도 잘 있다. 베르사유와 파리를 안심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더 자세히 쓸 겨를이 없다. 가능한 대로 곧 상세한 소식을 보내겠다.”
한편 왕세자는 모후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사랑하는 어머니, 국왕께서 방금 거두신 승리의 기쁨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곳에서 언제나 진정한 왕이셨습니다. 특히 승리가 우리 편에 기울 것 같지 않아 보였을 때, 모두가 혼란에 빠져 있는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침착함과 단호함으로 가장 현명한 명령을 직접 내리셨습니다. 그 모습은 어디에서보다도 그곳에서 가장 빛났습니다.”
저녁이 든 폰트노아
이제 저녁이 폰트노아에 내려앉았다. 프랑스의 왕과 그 아들은 전장을 거닐었다.
“보라, 아들아. 승리를 거두는 데 선량한 마음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는지를. 적의 피도 언제나 사람의 피다. 진정한 영광은 그 피를 아끼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