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로셸을 덮친 두 번의 위대한 포위전
프랑스 서부 항구도시 라로셸은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두 차례의 포위전을 겪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각각 종교 전쟁과 절대왕정 강화기라는 프랑스 근세사의 중요한 전환점과 맞물려 있습니다.
첫 번째 포위전(1572~1573)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여파
첫 번째 포위전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1572년)을 계기로 촉발되었습니다. 당시 라로셸 인구의 거의 전부가 개신교도였으며, 학살 소식에 불안과 분노에 휩싸인 그들은 왕권에 대해 무장 항쟁을 일으켰습니다.
긴 협상이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고, 마침내 1572년 12월 거대한 왕군이 도시를 에워쌌습니다. 이듬해 2월에는 앙주 공작이 포위군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수비자들의 저항은 놀랄 만큼 견고했고, 결국 국왕은 직접 강령을 내려 평화 체결을 명령했습니다. 조약은 1573년 7월 1일에 서명되었으며, 그 결과 라로셸과 님, 몽토방 세 도시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
두 번째 포위전(1627~1628) — 리슐리외의 대결의식
두 번째 포위전은 첫 번째보다 훨씬 길었고, 훨씬 많은 희생을 낳았습니다. 낭트 칙령 이후 남부와 남서부의 개신교도들은 '왕국 안의 나라'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확보한 '안전 장소(safe places)'에서는 완전한 자치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라로셸은 가장 강력한 거점이었습니다. 험준하고 견고한 성벽만이 아니라 외국과의 교통이 용이한 항구라는 점도 컸습니다. 루이 13세 통치 초기, 반란을 일으킨 개신교 진영은 바로 라로셸 항구를 통해 잉글랜드의 원조를 받아들였습니다. 국왕은 1622년 직접 포위전을 시도했으나 곧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년 후, '함락될 수 없는 도시'라는 여론에 정면으로 맞서며 리슐리외 추기경은 국왕과 함께 라로셸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점령하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왕실 재정은 사실상 파산 직전처럼 궁핍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추기경은 슴베르크와 바송피에르의 보좌를 받아 직접 작전 지휘를 맡았습니다.
바다까지 막은 초대형 공사
우선 영국군은 레섬 섬(Île de Ré)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육지 방면으로는 도시가 12km에 달하는 참호로 완전히 둘러싸였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항구였습니다. 엔지니어 티리오와 메트조의 설계에 따라 길이 1,500m, 폭 8m의 방파제가 건설되어 항구 입구를 봉쇄한 것입니다.
영국 함대는 공사 완공을 저지하고 도시에 보급품을 전달하려 했지만, 버킹엄 공작의 우유부단과 영국 정부의 무질서가 그대로 드러난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작전은 어수설했고, 호응이 어긋났으며, 망설임이 가득했습니다. 이후 다시 시도된 더 본격적인 구원 작전마저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라로셸은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14개월의 굶주림 끝에
공사가 완성되자 이제 로셸루아(Rochelais), 즉 라로셸 시민들이 스스로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은 활기찬 시장 장 기통(Jean Guiton)의 지휘 아래 경탄할 만한 용기를 발휘하며 14개월 넘게 버텼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굶주림 앞에서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고, 1628년 10월 29일 도시는 항복합니다. 사망자는 약 15,000명으로 추산됩니다.
관용의 조건과 상실된 특권
국왕은 얻기 어려웠던 승리를 오용하지 않겠다며, 자신에게 맞서 싸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요구한 것은 성벽의 철거와 가톨릭 예배의 회복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라로셸은 '왕국의 그 어떤 도시보다 컸던' 특권들을 영원히 잃고 말았습니다. 한때 유럽 최고의 자유항으로 불리던 도시의 황금기는 이로써 막을 내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