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역사상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미미한 대가를 위해 이토록 격렬하게 싸운 적은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원래 빈 회의에서 확립된 유럽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단기 전역 몇 번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공세들은 최종 해결이 아니라 참호전의 악몽만을 안겨주었고, 유럽 정치는 수년 동안 전장의 진흙 속에 갇힌 채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현대 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카메라와 영상 장비가 전쟁의 실상을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면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전쟁이었다. 분쟁의 규모와 참호 양측에서 발생한 막대한 인명 손실은 그 어떤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베르됭, 이프르, 솜 전투는 군사사뿐만 아니라 학교 교과서에까지 기록될 만큼 악명이 높아졌다. 놀라운 사실은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교착 상태를 돌파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서부 전선은 극도로 피비린내 나고 잔혹한 양상을 보였다. 이 전쟁의 특징적인 모습 중 하나는 생각보다 좁은 땅을 두고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베르됭 전투만 해도 무려 8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는 당시 베르됭 마을 인구의 40배에 달하는 수치다. 거대하고도 헛된 희생이었다.
역사학자 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는 저서 『유럽사』에서 베르됭 공세 당시 두오몽 요새 전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밤낮으로 포격에 시달리고 파손되며, 끊임없는 폭발에 흔들린 두오몽 요새의 잔해와 지하 통로는 백병전의 무대이자 폐허 아래 산 채로 매장된 부대 전체의 무덤이 되었다. 총알은 달 표면 같은 이 황무지를 끊임없이 뒤흔들었고, 마침내 진흙과 벽돌 조각, 인간의 유해가 뒤섞인 차가운 진창으로 변하고 말았다."
두오몽 요새 — 왼쪽은 전투 후, 오른쪽은 전투 전의 모습
전쟁 신경증
참호 속에서 이어진 장기간의 스트레스와 소모전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양측 병사들에게 끔찍한 상흔을 남겼다. 많은 병사들에게 포탄 폭발로 팔이나 다리를 잃는 것이 오히려 참호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구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전쟁은 병사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규모의 새로운 개념과 현상이 등장했다. 오늘날 전투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알려진 이 질환은 수많은 병사들을 괴롭혔다.
당시 군 당국은 이러한 증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일부 병사들은 겁쟁이나 탈영병으로 취급되어 가혹한 처벌을 받기도 했다. 이후 의학계는 포탄 폭발의 물리적 충격과 극심한 심리적 스트레스가 함께 작용한 결과임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는 현대 정신의학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일부 병사들은 몸에 상처 하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 세대의 젊은이들이 통째로 낭비되고 만 것이다.
이프르 전투에 참전한 호주 병사(왼쪽 아래)가 전투 충격 증상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