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를 뒤흔든 '독극물 사건', 왕의 정부까지 휘말린 스캔들

17세기 후반 루이 14세의 통치 시절, 프랑스 궁정과 파리 전체를 뒤흔든 대형 스캔들이 있었다. 바로 '독극물 사건(Affaire des Poisons)'이다. 이 사건은 특별 심판 기구인 '화형 재판소(Chambre Ardente)'가 구성될 정도로 번져갔고, 결국 국왕과 너무나 가까운 인물들이 연루되면서 왕의 명으로 종결되었다.

독극물과 흑마술이 만연하던 시대

루이 14세 치세의 프랑스에서는 독극물이 주술만큼이나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죽음이 조금이라도 수상하거나 갑작스럽게 닥쳐오면 사람들은 서슴지 않고 독살을 의심했으며, 실제로 독약을 사용하는 이들도 드물지 않았다. 국왕의 친정 초기 여러 재판이 세간의 화제를 모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라레니(La Reynie) 경찰 총감에게 1675년 3월 체포되어 같은 해 7월 참수형에 처해진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Marquise de Brinvilliers)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사는 후작 부인의 처형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수사관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지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점쟁이, 마술사, 무녀, 낙태술사, 독살자는 물론 수상한 술사와 성직록을 박탈당한 사제들까지. 이들은 궁정 귀족부터 평민에 이르는 온갖 계층의 의뢰인에게 물약과 독약을 거래하고 판매하고 있었다.

함정에 빠진 점쟁이들, 그리고 화형 재판소의 탄생

점을 보는 여인 마리 보스(Marie Bosse)는 독살 청부로 큰돈을 벌겠다고 무례하게 자랑을 늘어놓다가 경찰이 설치한 함정에 걸려 체포되었다. 그녀에 이어 같은 밀거래에 가담한 비구루 부인(La Vigouroux), 그리고 악명 높은 라 부아장(La Voisin) 등 수십 명의 마술사, 독살자, 사제들이 잇달아 검거되었다.

사건의 규모가 워낙 방대해지자 루이 14세는 1679년 특별 위원회, 즉 '화형 재판소'의 설치를 결정했다. 재판소는 1680년 1월 아르스날(Arsenal)에서 개정되어 라레니가 의장을 맡았으며, 무려 367명이 회부될 예정이었다.

재판의 핵심, 라 부아장

주요 피고인 라 부아장은 독살과 낙태, 흑미사(블랙 미사) 집전 혐의를 받았다. 그녀는 흑미사를 집전하던 섬뜩한 인물인 기부르 신부(Abbé Guibourg)에게 제물로 바칠 아이들을 공급하기도 했다. 고문을 당한 그녀는 모든 죄를 자백했지만, 몽테스팽 부인에 관해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1680년 2월 22일, 이 독살자는 그레브 광장(Place de Grève)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심문은 계속되었다. 같은 해 8월, 라 부아장의 딸은 라레니에게 몽테스팽 부인(Madame de Montespan)이 기부르 신부가 집전한 흑미사에 참여했다고 폭로한다. 기부르 신부 역시 미사 축성 과정에서 국왕과 그 애첩의 이름을 불렀음을 인정했다.

몽테스팽 부인의 소원과 음모

흑미사를 통해 몽테스팽 부인이 빌었던 것은 국왕과 왕태자의 총애, 라발리에 부인(Mademoiselle de La Vallière)의 실각, 그리고 왕비의 불임과 폐위였다. 이는 그녀가 국왕과 결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국왕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녀는 흑미사에서 제물로 바쳐진 아이의 피로 만든 물약과 갖가지 '마력이 있다고 알려진' 유해한 물품들을 구해, 국왕이 모르게 먹였다는 것이다. 루이 14세가 겪던 잦은 몸살이 바로 이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소원들은 재판 몇 년 전부터 빌어진 것들이었는데, 일부는 실제로 이루어졌다. 국왕은 라발리에 부인에게서 멀어졌고, 새 애첩인 몽테스팽 부인 사이에서 자녀들을 얻기 시작했다. 나아가 라 부아장의 딸은 몽테스팽 부인이 정적인 퐁탕주 부인(Madame de Fontanges)과 국왕 본인마저 독살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고발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 고발들을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을까? 몽테스팽 부인을 고발했던 또 다른 독살자는 화형대에 오르는 순간 증언을 번복했다. 확실한 것은, 죽음을 피하고 재판을 끝내기 위해 피고인들이 최대한 지위 높은 인물들을 연루시킬 유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마자랭 추기경의 조카딸들인 부용 공작 부인과 수아송 백작 부인, 뤽상부르 원수, 폴리냑 자작 부인, 극작가 라신, 그리고 물론 국왕의 정부(情婦)까지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라레니의 관찰에 따르면, 몽테스팽 부인은 이미 1668년 독극물 사건의 피고인이 될 두 인물, 즉 마리에트 신부와 마술사 르사주에 대해 제기된 소송에 연루된 바 있었다. 그때부터 이미 '가루(powders)'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경찰 총감과 국왕은 몽테스팽 부인의 부분적 유죄를 믿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국왕의 명령으로 끝난 조사

결국 1680년 9월 30일, 루이 14세는 조사 중단을 명령했다. 라레니는 크게 실망했다. 화형 재판소가 선고한 사형 36건 중 34건이 집행되었지만, 아직도 147명이 바스티유 감옥이나 방센(Vincennes)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무작위로 선발된 두 명은 동료들과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

주요 피고인들은 각지의 요새로 이송되어, 루부아(Louvois)의 명령에 따라 벽에 고정된 쇠사슬에 묶였다. 한 감옥에 여섯 명씩 수감된 이 '쇠사슬에 묶인 자들'은 이런 신세로 죽음을 기다렸고, 어떤 이는 무려 40년이나 이런 상태로 살아남기도 했다.

몽테스팽 부인의 죄는 어디까지?

몽테스팽 부인의 독살 혐의에 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하나도 없다. 반면 그녀가 흑미사를 지시했을 가능성은 높으며, '연애 가루'라 불리는 물약을 공급하던 라 부아장과 내왕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