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로 처형되는 죄수들을 그린 빈티지 판화 • WIKIMEDIACOMMONS
"기유랴 의원은 / 의학에 / 무척 능숙하고 총명하여 / 한 대의 기계를 만들었네 / 꿈꾸는 자들을 / 프랑스의 몸에서 싹뚝 걷어내는 / 그것이 기요틴이다, 아! / 그것이 기요틴!"
1793년, 혁명이 내전으로 번져가던 시절. 동시대인들의 마음을 매혹과 공포 사이에서 오가게 만든 그 기계를 풍자하는 노래였다. 국민의회에 제안된 지 4년, 단두대는 이제 형사 사법의 새로운 도구라는 차원을 훌쩍 넘어선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초로 거론된 것은 1789년 12월 1일의 일이다. 사법 개혁 논의가 한창이던 가운데, 의사이자 의원인 조제프 이냐스 기요탱(Joseph Ignace Guillotin)이 발의한 법안이 의회에 상정되었다.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제6조였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는 누구든 예외 없이 같은 방식으로 처형하자는 것이었고, 그 방식이란 "간단한 장치의 작동으로" 머리를 잘라내는 것이라 했다.
참수의 특권
그 이전의 사형 집행 방식과 비교하면 이는 분명한 진보였다. 당시까지 귀족만이 도끼나 칼로 참수될 특권을 누렸다. 머리를 잘린다는 것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는 처형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반면 평민 출신 죄수 대다수는 교수형, 바퀴형, 갈대형 같은 굴욕적인 형벌을 받아야 했다. 고문을 당한 뒤 시체는 길거리에 오래 전시되어 사람들 눈앞에 그 수치를 드러내야만 했다.
하지만 단두대가 추구한 것은 모든 이를 사형 앞에서 평등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음마저 인도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자는 것이다. 이미 1777년 장 폴 마라(Jean-Paul Marat)는 『형법 개혁안』에서 "고문의 장치는 끔찍하게 만들되, 죽음 자체는 부드럽게 하자"고 적지 않았던가. 계몽주의 이상에서 영감을 받은 이러한 형벌 인도화 프로젝트는 프랑스 혁명가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단두대 역시 오랫동안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같은 목적, 즉 사법 집행의 완화를 위해 설계·사용되어 온 장치들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시신으로 실험하다
그럼에도 프랑스 의원들은 단두대 채택을 앞두고 오랜 망설임을 보였다. 기요탱 법안의 첫 다섯 조항은 비교적 순조롭게 통과되었지만, 사형 집행 방식에 관한 논의는 계속 연기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정치적 논의는 환상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즉각적이고 기계적이며 평등한 처형이라는 발상에 충격을 받은 일부 신문들은 기요탱을 조롱했고, 터무니없이 지어낸 발언을 그의 이름으로 유포했다. "내 기계면 순식간에 머리를 날려주지. 그것도 아무런 고통도 못 느끼고 말이야."
이 문제가 다시 의회에 상정된 것은 한참 뒤인 1792년 봄,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1791년 6월 3일 통과된 사형법은 사형집행관의 손보다 더 효과적이고 빠르며 정확한 새로운 수단을 요구했다. 자문을 맡은 외과학 아카데미 상근 서기 루이(Louis) 박사의 답변은 명확했다.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계뿐이라는 것.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조롱의 대상이던 이 장치의 시제품을 의회는 급하고도 시큰둥한 마음으로 주문했다. 제작을 맡은 이는 하프시코드 장인 장 토비 슈미트(Jean-Tobie Schmidt)였다.
1792년 의원들이 단두대 시제품 제작을 의뢰한 상대는 다름 아닌 하프시코드 장인이었다.
4월 17일, 파리 근교 비세트르(Bicêtre) 병원 안뜻에서 이 기계는 산 양과 인간 시신을 대상으로 실험되었다. 참석자들은 엄선되었다. 의사들, 의원들, 구호 위원회 회원들, 그리고 당연히 사형집행관 상송(Sanson)도 함께였다. 모두의 평가는 만족스러웠다. "슈미트 씨의 기계 실험이 화요일 비세트르에서 시신 세 구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는데, 너무나 깨끗하게 참수하여 그 위력과 속도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프랑스에서 이 기계의 실질적인 설계자였던 루이 박사는 이내 기요탱에 가려졌고, 결국 기요탱의 이름이 이 물건에 남게 되었다.
성가신 효율성
실험 일주일 뒤, 단두대는 파리에서 실전에 투입되었다. 초대식을 연 이는 행인을 습격해 구타하고 강도질을 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니콜라 자크 펠르티에(Nicolas Jacques Pelletier)였다. 그레브 광장(Place de Grève)에서 열린 이 처형은 큰 화제를 모았다. 그날 운집한 구경꾼들은 처형장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지만, 절차의 믿기 힘든 속도 앞에서 허탈함을 느꼈고, 심지어 충격을 받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칼날이 펠르티에의 목을 자르자 머리가 피를 흩뿌리며 바구니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하게 성공한 처형이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불안한 순간으로 받아들였다. 사형집행관의 길고 정해진 의식들이 예전에는 처형의 엄중함과 중요성, 신성함을 강조해 주었다면, 이제는 빠르고 차갑고 조용하며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 칼날의 일격이 사형 집행을 더욱 일상적이고 무미건조한 것, 궁극적으로는 더 섬뜩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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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 봄, 신문 『파리 혁명들(Les Révolutions de Paris)』의 편집자 프루돔(Prudhomme)은 그때까지 이 기계를 진보의 도구로 내세워 온 이들의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 기계는 질서 유지의 필요와 정의 실현의 필요 사이에서 가능한 최선의 타협점처럼 보였다. "인류가 지켜야 할 것과 법이 요구하는 것을 더 잘 조화시키는 죽음의 도구는 상상하기 어려우므로." 그럼에도 프루돔이 썼듯이 단두대의 이미지는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었다. 두 달 전, 이 기계는 국왕의 목을 베는 데 사용되었다. 특별 사법 체계가 들어서면서 프랑스 곳곳에서 처형대는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테러의 상징
산퀼로트들은 호탕한 자부심으로 이 기계를 환영했지만, 반혁명 진영에서 단두대는 혁명의 괴물성을 상징하는 증오의 대상이자 그 시대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표본이 되었다. 테러기를 관통하며 이어진 일련의 처형들의 기계적 공포야말로 인간이 본성에서 이탈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아니란 말인가? 백과전서파와 철학자들이 '새로운 인간'의 이름으로 추진한 발명과 기계들이 실은 인류를 스스로의 파멸로 끌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가? 소설과 노래, 판화 속에서 단두대는 세계 질서를 뒤집겠다며 삶과 죽음마저 지배할 수 있다고 오만하게 믿었던 프랑스 혁명가들의 프로메테우스적 망상을 구현하는 존재가 되었다.
혁명가 대다수는 대체로 더 절제된 입장이었지만, 혁명에 대한 무기로 의도적으로 동원된 이 과격한 상상력이 자기들 모순의 어떤 진실을 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프루돔은 이를 자각했다. "이 고문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사형수의 고통은 덜어주지만 구경꾼들에게서 피의 광경을 충분히 가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두대 날에서 흘러내린 피가 처형대가 놓인 돌바닥에 드넓게 뿌려지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불쾌한 광경을 백성들의 눈앞에 내보여서는 안 된다. 생각보다 심각한 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법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살인이긴 하나 그 침착함이 고의적인 잔혹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인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긴 논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20세기 말까지 사용된 단두대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혁명에 관한 가장 질긴 고정관념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더 알아보기
단두대와 테러의 상상력(The Guillotine and the Imaginary of Terror), D. 아라스(D. Arasse), 샹(Champs), 플라마리옹(Flammarion), 2010.
기요탱 이전의 단두대
1789년 이전 유럽에서는 칼이나 도끼를 사용한 처형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장치가 활용되었다. 이미 1765년 라 포르트 신부(Abbé de La Porte)는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된 이 기계를 이렇게 묘사했다. "사용되는 도구는 한 발 폭의 정사각형 쇠붙이로, 극도로 날카로운 절단면을 지녔다. […] 신호가 주어지자마자 […] 집행자가 쇠붙이를 자유롭게 떨어뜨린다."
단순하고 효율적인 메커니즘
1792년 3월 7일 루이 박사가 국민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여러 장인들이 서로 매우 다른 참수 기계 설계안을 내놓았다. 몇 주 후 그 형태가 확정되었다. 때로 붉은색으로 칠해지거나 붉은 나무로 만들어진, 높이 약 4미터의 이 도구는 값이 저렴하고 단순하며 효과적인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어 표준화된 방식으로 복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