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영국과의 독립전쟁은 1775년 4월 19일 보스턴 포위전, 즉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식민지 대중의 반응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사건은 그보다 앞선 1774년 9월 1일에 일어난 '화약 경보(Powder Alarm)'였다. 이 사건은 미국 민족의 자유를 위한 전쟁의 서막을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775년 초, 미국인들은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확보하고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군은 병력의 숫자와 질 모두에서 영국군에 크게 열세였다. 그럼에도 영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저항 행동은 날로 격화되어 갔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세인트 존 교회에서 행한 유명한 연설에서 패트릭 헨리는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다.
북부에서의 첫 충돌(1775년)
영국군과 미국인들 사이의 첫 전투는 보스턴 서쪽 몇 킬로미터 지점에서 벌어진 렉싱턴·콩코드 전투(1775년 4월 19일)였다. 미니트맨(minutemen)의 신속한 개입 덕분에 이 첫 교전은 반군에게 유리하게 마무리되었으며, 영국군 73명과 미국인 49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전투는 이후 이어질 게릴라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미국군이 티콘더로가 요새를 함락한 바로 그날, 제2차 대륙회의의 첫 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회의는 6월 15일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파벌로 나뉘고 규율 없이 흩어져 있던 부대를 하나로 정비하는 것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군인들에게 급여를 지급할 자금이 크게 부족했고, 탈영 사례도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굳건한 결의와 더불어 본토 영국과의 먼 거리라는 지리적 이점을 무기로 삼았다.
대륙회의는 영국에 맞서기 위해 캐나다에도 새로운 호소를 보냈다. 또한 7월 8일에는 영국 국왕에게 유명한 '올리브 가지 청원(Olive Branch Petition)'을 보내 화해를 시도했으나, 이 평화 노력은 결국 조지 3세에 의해 거절당했다.
미국군은 보스턴을 장기간 포위 공격했고(1775년 4월 19일 ~ 1776년 3월 17일), 1775년 6월 17일 벙커힐 전투에서는 패배를 기록했다. 영국군은 도시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지만 상상 이상의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결국 영국군은 1776년 3월 17일 노바스코샤로 철수하고 말았다. 한편 미국군은 캐나다를 침공해 몬트리올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1775년 11월 13일), 혹독한 캐나다의 겨울 추위와 현지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연말까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