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비극… 패망 한 달 전, 히틀러가 독일 저항가들을 처형하다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비극… 패망 한 달 전, 히틀러가 독일 저항가들을 처형하다

끝없는 어둠 속의 처형: 1945년 4월 9일

1945년 4월 9일 새벽, 나치 독일은 강제수용소에서 독일 저항 운동가들에 대한 마지막 처형을 집행했다.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는 여섯 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히틀러에 맞선 독일 저항 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개신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영국인 죄수에게 작별 인사를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끝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이다."

바로 그날,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과 한스 오스터, 루트비히 게레, 그리고 법률가 카를 자크와 테오도어 슈트룽크도 함께 처형되었다. 이들은 모두 아돌프 히틀러 암살과 나치 정권 전복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인물들이었다.

같은 날 밤, 1939년 뮌헨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 홀에서 자작 폭탄으로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목공 기게오르크 엘저가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거의 같은 시각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는 본회퍼의 매부이자 법률가인 한스 폰 도나니가 생명을 잃었다. 그는 플로센뷔르크에서 처형된 음모자들과 긴밀히 협력해 온 인물이었다.

전후 독일의 재건에 기여하지 않기 위해

약 한 달 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정권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베를린 독일 저항 기념관 관장이자 역사학자인 요하네스 투헬은 독일 통신사 dpa에 "나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반대파들을 박해했다. 전후 독일의 재건에 기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4월 9일의 처형은 아돌프 히틀러의 복수심 어린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복수 행위였다"고 강조했다.

나치에 맞선 독일인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저항 운동가들의 처형은 그들이 사회 각계각층 출신이었음을 보여준다. 방첩국 국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부터 목공 기게오르크 엘저까지. '백장미' 운동의 대학생 소피 숄과 한스 숄 남매를 비롯해 보수파, 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들도 저항 세력에 함께했다.

처음에는 전쟁을 막고, 이후에는 끝내려 했다

1938년부터 고위 군인과 공무원들은 아돌프 히틀러 암살을 시도해 왔다. 처음에는 전쟁을 막기 위해, 그다음에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저자 요아힘 페스트가 저서 『쿠데타』에서 쓴 것처럼, 그들의 목표는 히틀러와 그의 정권이 상징하는 모든 것에 대해 큰 '아니오'를 외치는 것이었다.

'퓌러' 암살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은 귀족 출신 장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였다. 그러나 1944년 7월 20일의 그의 시도마저 실패로 돌아갔다. 카나리스 제독은 방첩국 국장으로서 오랫동안 한스 오스터 장군과 같은 음모자들을 보호해 왔다. 처형 직전 감옥에서 그는 동료 죄수에게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독일인으로서 나는 다만 내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퓌러'를 암살하려 했던 목수

방첩국과 연결된 음모자 중에는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도 있었다. 그는 교회 인맥을 통해 외부 세계에 나치 독일 안에 히틀러 전복을 추구하는 장교 그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려 했다. 처형된 지 75년이 지난 지금, 이 독일 신학자는 나치에 맞선 가장 중요한 저항 운동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수많은 거리와 학교, 교구가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전후 독일은 오랫동안 게오르크 엘저의 저항 공헌을 인정하는 데 고심했다. 이 목수는 30일 밤을 뷔르거브로이켈러의 기둥에 구멍을 파고 폭발 장치를 설치하는 데 쏟아부었다. 그 폭탄으로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을 암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폭발 불과 몇 분 전, 독재자는 뮌헨의 그 맥주 홀을 떠난 뒤였다. 역사학자 요하네스 투헬에 따르면, 오늘날 게오르크 엘저는 전쟁을 막기 위해 폭군과 그의 특권층을 몰아내려 했던 용감한 인물로 기리고 있다.

출처: D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