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슬링 전투의 한 장면
에슬링 전투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혹은 '아스페른 전투'라고도 불리며, 1809년 5월 20일부터 22일까지 빈 교외에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격돌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양측 합계 약 45,000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으며, 특히 프랑스군의 명장 장 란(Jean Lannes) 원수는 22일 입은 부상이 화근이 되어 5월 3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슬링 전투는 나폴레옹이 정면 대결에서 처음으로 겪은 대규모 패배로 기록됩니다.
오스트리아의 반격 결심
1809년,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이 스페인의 끝없는 전쟁에 발목 잡혀 있는 상황과 러시아와의 동맹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굴욕을 설욕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한 오스트리아는 선제공격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오스트리아가 바이에른 방면에서 공세를 개시하는 동안, 나폴레옹은 독일에서 대규모 군대를 급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만 이 병력은 스페인 전선의 베테랑 부대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에크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레겐스부르크 공성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신속하게 빈까지 진격합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다뉴브 강 북안으로 질서 있게 후퇴해 전력을 온전히 보존한 상태였고, 오스트리아는 강화를 거부했습니다.
다뉴브 강 도하 작전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하는 동안, 카를 대공은 다뉴브 강의 다리들을 모두 파괴한 뒤, 수도에서 북동쪽 약 5km 지점의 좌안 고지 비잠베르크(Bisamberg) 부근에 군대를 재집결시켰습니다.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려면 다뉴브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강을 여러 갈래 수로로 가르는 섬들 중 하나인 로바우(Lobau) 섬이 도하 거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5월 19일 밤부터 20일 사이 우안에서 로바우 섬까지 가교가 놓였고, 20일 저녁에는 마침내 로바우 섬에서 좌안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다리가 완성됩니다. 마세나(Masséna) 원수의 사단들이 즉시 좌안으로 건너가 오스트리아군의 전초 진지를 제압했습니다.
후방에 대한 위협이 커지자 나폴레옹은 가용한 모든 병력을 다리로 보냈습니다. 21일 새벽, 무려 4만 명의 병사가 좌안의 광활한 평원 마르히펠트(Marchfeld)에 집결했습니다. 이곳은 훗날 바그람 전투가 벌어질 역사적 현장이기도 합니다.
카를 대공은 도하 자체에는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계획은 어느 정도 규모의 프랑스군이 강을 건너게 한 뒤, 나머지 본대가 합류하기 전에 선제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능한 모든 대대를 소집해 피해를 줄이려 했습니다. 마르히펠트에 집결한 프랑스군은 다리 앞쪽에 배치되었고, 좌익에는 아스페른(Gross-Aspern) 마을, 우익에는 에슬링(Essling) 마을이 위치했습니다. 아스페른은 강의 한 갈래 수로 기슭에 자리해 좌측으로 우회할 수 없는 요충지였으며, 프랑스군은 두 마을을 잇는 전선을 따라 전진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힐러(Hiller), 벨가르드(Bellegarde), 호엔촐레른(Hohenzollern) 부대는 아스페른으로 진격해 에슬링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고,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중앙에 배치되어 프랑스 기병대의 어떤 공격에도 즉각 대응할 준비를 갖췄습니다. 한편 21일이 되자 다리들은 끊임없이 건너는 병사들의 무게와 격렬한 물살 때문에 점점 불안정해져 갔습니다.
첫째 날 – 5월 21일
전투는 아스페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힐러는 첫 돌격에서 마을을 점령했지만, 마세나가 곧바로 탈환하며 마렝고 전투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끈기로 확보한 진지를 사수했습니다. 프랑스 보병은 최근 전투에서 부족했던 용기를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세 개 종대는 마을의 절반 이상을 되찾는 데 실패했고, 해 질 녘에도 마세나는 여전히 진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에 집중된 오스트리아 포병대를 무력화하기 위해 중앙의 기병대에 돌격을 명령해 양동 작전을 시도했습니다. 첫 번째 돌격은 격퇴당했지만, 중장기병(큐라시에) 대규모 부대로 구성된 두 번째 돌격은 포수들을 몰아내고 호엔촐레른 보병 진지를 돌파하며 리히텐슈타인 기병대마저 저지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전과를 넓히지 못하고 결국 원진지로 물러났습니다.
한편 에슬링에서도 아스페른에 버금가는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프랑스 중장기병은 로젠베르크(Rosenberg) 부대의 측면을 기습 공격해 적의 돌격을 막아냈습니다. 마을 안에서는 장 란이 단 하나의 사단으로 밤이 올 때까지 용감하게 저항했습니다. 양군은 현장에서 야영에 들어갔지만, 아스페른에서는 밤에도 포성이 멎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낙담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모든 병사들을 격려하며 돌았습니다.
둘째 날 – 5월 22일
22일 새벽 전투가 재개되었습니다. 마세나가 아스페른에서 적을 몰아내는 동안, 로젠베르크는 에슬링을 강습했습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장 란은 생틸레르(Saint-Hilaire) 사단의 증원을 받아 로젠베르크를 격퇴했습니다. 그러나 아스페른에서는 마세나가 차례로 힐러와 벨가르드의 역습에 밀려났습니다.

- 로바우 섬의 몰리토르 사단 경보병(볼티저)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 중앙을 향해 대규모 공격을 개시합니다. 좌익의 장 란과 예비대 기병을 포함한 프랑스군 중앙 전체가 전진했고, 로젠베르크 우익과 호엔촐레른 좌익 사이에서 오스트리아 전선이 돌파되었습니다.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순간, 카를 대공이 직접 군기를 앞세우고 예비대를 이끌고 나섰습니다. 아스페른은 함락되었고, 이미 한 번 파괴되었던 다뉴브 강의 다리들은 오스트리아군이 일부러 물살에 흘려보낸 무거운 바지선들에 의해 다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에슬링은 로젠베르크의 또 한 번의 맹공격에 함락되었고, 로젠베르크는 곧바로 공격을 서서히 물러나던 프랑스군 중앙으로 돌렸습니다. 이 철수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처참할 만큼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극도로 지친 상태에 이르렀고, 이로써 전투는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전투의 결과
프랑스군은 차례로 투입된 9만 명 가운데 2만 1천 명을 잃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인 장 란 원수를 잃었고, 그는 며칠 뒤 부상으로 사망했습니다.
22일 밤 마지막 다리가 수리되었고, 프랑스군은 로바우 섬으로 철수해 증원군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에슬링의 패배는 나폴레옹에게 오만함의 대가를 일깨워 준 교훈이었으며, 그는 이후 다뉴브 강 도하를 더욱 신중하게 준비해 7월 바그람 전투에서 설욕에 나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