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 후작: 프랑스 혁명 전장에서 나폴레옹 제국 원수까지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Catherine-Dominique de Pérignon, 1754년 5월 31일 그르나드쉬르가론 ~ 1818년 12월 25일 파리)은 1804년 프랑스 제국의 원수로 임명된 인물이다.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 후작: 프랑스 혁명 전장에서 나폴레옹 제국 원수까지
페리뇽, 카트린-도미니크 (후작)

출생 배경과 군 입대

페리뇽은 16세기부터 랑그독 지방의 그르나드쉬르가론(Grenade-sur-Garonne)에 뿌리내린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그중 한 갈래는 18세기 툴루즈 시의 카피툴라(Capitoulat)에 의해 귀족 작위를 받았다. 탄탄한 교육을 마친 뒤 그는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기옌(Guyenne) 왕립 척탄병 연대에서 소위 임관장을 취득했고, 1780년에는 프레사크 백작(Comte de Preissac)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세귀르 개혁이 평민과 하급 귀족에게 진급의 길을 사실상 막아버리자, 그는 직책을 사임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문민 생활을 보냈다.

프랑스 혁명과 입법 의회

1789년 혁명의 소식에 호의적으로 반응한 페리뇽은 새로운 질서의 이념을 받아들였다. 그는 몽테슈(Montech) 캉통의 치안판사 직을 수락했고, 이 대중적 직무를 수행하던 중 오트가론(Haute-Garonne) 주 유권자들의 신뢰를 얻어 1791년 입법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장교로 복무한 경험과 판사로 재직한 경력은 그의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입법 의회에서는 우파에 앉아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나, 전쟁이 선포되자마자 의석을 내려놓고 피레네오리앙탈(Pyrénées-Orientales)군 소속 보병 중령으로 전장에 나섰다.

피레네 전선의 영웅

1793년 7월 17일 튀르(Thuir)와 마드세르(Mas-de-Serre) 전투에서 그의 무모할 정도의 용맹함은 프랑스군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트루야스(Truillas) 전투에서 인민대표들 앞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1793년 대령으로 승진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준장 계급을 받았다.

두 달 뒤인 공화력 2년 니보즈 3일(1793년 12월 23일) 소장으로 진급하여 수많은 승전을 거두었다. 특히 페르피냥(Perpignan) 요새를 구하는 영광을 안았으며, 이 전투에서 허벅지에 총검에 찔리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1794년에는 불로뉴 진영을 점령했다.

1794년 6월 7일 라준케라(La Junquera)에서 승리한 뒤, 공화력 3년 브뤼메르 28일부터 시작된 몽타뉴누아르(검은 산) 전투(1794년 11월 17~20일)에서는 군 중앙을 지휘하며 스페인군과 맞섰다. 이 전투에서 뒤공미에(Dugommier) 장군이 최전선에서 전사하자, 페리뇽이 그의 뒤를 이어 지휘권을 물려받았다.

에스콜라(Escola) 전투의 승리와 난공불락이라 일컬어지던 로사스(Rosas) 요새와 항구 도시의 함락은 그의 지휘 능력을 영광스럽게 입증해 주었다. 이후 피게르(Figuières)를 점령했으나, 1795년 5월 6일 바스카라(Bascara)에서는 패배를 맛보기도 했다.

외교관으로서의 삶

오트가론주는 그를 오백인 평의회(Council of Five Hundred) 의원으로 선출했다. 공화력 3년 메시도르 4일(1795년 6월 22일) 바젤 조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이 화해하자, 페리뇽은 마드리드 주재 대사로 임명되어 자신의 승리로 회복된 양국 관계를 공고히 하고 공수동맹을 체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2년 뒤 트뤼게(Truguet) 부제독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그 결과물이 1796년 8월의 산일데폰소 조약(Treaty of San Ildefonso)이었다.

그러나 1797년 왕당파 스파이와 얽힌 사건으로 정무부(Directory)에 소환되어 예비역 처분을 받았다. 1799년 복무에 복귀하여 리구리아(Liguria) 주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탈리아군에서 다시 전열에 섰다.

노비 전투와 포로 생활

노비(Novi) 전투에서 페리뇽은 좌익을 지휘했다. 그의 두 개 사단은 그루시(Grouchy)와 르모안(Lemoine) 장군의 지휘 아래 보르미다(Bormida)강과 타나로(Tanaro)강 유역을 방어했다. 페리뇽은 파스투라나(Pasturana) 마을을 끝까지 사수하며 놀라운 용맹함을 발휘했지만, 압도적인 적군에 밀려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적의 포로가 되었다(1799년 8월 15일).

공화력 9년(1801년)에야 러시아를 통해 프랑스로 송환되었다. 마렝고(Marengo) 전투의 승자 보나파르트는 노비에서 불운을 겪은 용맹한 군인을 환영했지만, 이미 47세였던 페리뇽이 젊은 영웅을 따르는 젊은 지휘관들의 행렬에 끼기에는 때가 늦었다.

원로원 진입과 제국 원수 임명

보나파르트는 그를 원로원(Sénat) 의원으로 임명했고(1801년), 페리뇽은 이후 원로원 부의장을 지냈다. 현역에서 물러난 그는 공화국의 최고 입법 기구를 통해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공화력 4년 프뤽티도르 26일의 조약이 피레네 일대의 프랑스-스페인 국경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두자, 해당 조약의 서명자였던 페리뇽은 공화력 10년 프뤽티도르 24일(1802년 9월 11일) 특별 위원으로 파견되어 이 분쟁을 해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공화력 12년 방토즈 19일(1804년 3월 10일)에는 오트가론 선거인단 회장을 맡아, 같은 해 플로레알 16일(5월 5일) 선거인단 대표단을 제1집정관에게 알현시켰다. 그는 원로원에서 종신 집정제와 제국의 선포를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공화력 12년 방데미에르의 집정부 결정에 따라 보르도 원로원직(sénatorerie)을 보유했다.

제국 성립 다음 날인 플로레알 29일(1804년 5월 19일), 나폴레옹은 14명의 프랑스 원수를 임명하는 법령을 반포했고, 여기에 같은 칭호를 부여받는 원로원 의원 4명이 추가되었는데, 총사령관 경력자였던 페리뇽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임명 당시 이미 고령이었던 그의 군 경력은 원수 지팡이를 받기 전에 사실상 마무리된 상태였고, 이후 그의 커리어는 주로 행정 업무에 집중되었다.

원수이자 원로원 의원이 된 페리뇽은 공화력 13년 프레리알 25일(1805년 6월 14일) 명예군단 고위 장교(Grand Officier)에 임명되었고, 공화력 13년 플뤼비오즈 13일(1805년 2월 2일)에는 대십자 훈장(Grand Aigle)을 수여받았다.

행정가와 군 사령관으로서의 말년

1806년 파르마와 피아첸차(Plaisance) 총독에 임명된 그는, 1808년 조르당(Jourdan) 장군을 대신해 나폴리 왕국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 양시칠리아 훈장(Order of the Two Sicilies)의 고위 현직자로 서임되었고, 제국 백작 칭호도 받았다. 그는 나폴리 국왕이 프랑스에 대적한다고 선언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무라(Murat) 왕의 부재 시에는 나폴리 군을 대신 지휘했으며, 1813년 왕의 배반 조짐이 처음 드러나자 무라와 결별했다.

왕정복고와 최후

페리뇽은 나폴레옹이 퇴위한 뒤에야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러한 신속한 귀순은 열성과 협조의 증거로 평가받았고, 원로원의 퇴위 결의에도 서명했기 때문에, 왕국 섭정은 그를 제1군관구의 왕실 위원으로 임명했다. 이어 5월 31일, 6월 1일, 6월 4일의 왕실 칙령을 통해 차례로 생루이 훈장 기사, 망명군 출신 장교 칭호 검증 위원회 회장,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 귀족원 의원(peer of France)에 임명되었다.

1815년 제10군관구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3월에 비트롤 남작(Baron de Vitrolles)과 함께 남부 지역에서 나폴레옹에 맞서는 저항 계획을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고, 백일천하(Hundred Days) 동안 실무에서 배제되어 황제에 의해 원수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2월 왕정복고로 복권된 뒤인 1816년 1월 10일, 그는 같은 계급으로 제1군관구로 옮겨졌고, 같은 해 5월 3일 생루이 훈장 사령관 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파리 군정 총독을 지낸 후 1817년에는 후작(marquis)으로 승작되었다.

그는 네이(Ney) 원수 재판에서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으며, 1818년 12월 25일 파리에서 영예 속에 생을 마감했다.

페리뇽의 이름은 지금도 파리 개선문(Arc de Triomphe)에 새겨져 있다.

카트린-도미니크 드 페리뇽 후작: 프랑스 혁명 전장에서 나폴레옹 제국 원수까지
페리뇽 백작-원로원 의원의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