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 프랑스는 거대한 정치적 격변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1792년 8월 10일, ‘상쿨로트(Sans-Culottes)’라 불린 파리 민중이 튈르리 궁전으로 몰려가 루이 16세와 왕가를 포위하면서 왕권은 붕괴했고, 군주제는 폐지되었습니다.
이어 9월 20일의 발미 전투에서 혁명군은 국왕을 구출하기 위해 진격해 온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 즉 왕당파 군대를 상대로 첫 번째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에 힘입어 같은 해 9월 22일, 국민공회(Convention)는 제1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1793년 1월 21일, 역사에 남을 비극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주요 인물
- 자크 피에르 브리소(Jacques Pierre Brissot) – 지롱드파의 지도적 인물
- 장바티스트 클레리(Jean-Baptiste Cant Hanet dit Cléry) – 국왕의 시종
- 앙리 에식 에지워르 드 피르몽(Henry Essex Edgeworth de Firmont) – 국왕의 고해 신부
- 크레티앵 기욤 드 라모니옹 드 말세르브(Chrétien-Guillaume de Lamoignon de Malesherbes) – 국왕의 변호인
- 루이 오귀스트(Louis-Auguste), 즉 루이 16세 – 폐위된 프랑스 국왕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 – 산악파의 지도자
- 샤를앙리 상송(Charles-Henri Sanson) – 파리의 집행인
- 앙투안조제프 상테르(Antoine-Joseph Santerre) – 국민방위군 사령관
- 레몽 드 세즈(Raymond de Sèze) – 국왕의 변호인
- 프랑수아 드니 트롱셰(François Denis Tronchet) – 국왕의 변호인
- 피에르 빅투르니앵 베르니오(Pierre Victurnien Vergniaud) – 지롱드파 의원
재판 절차
폐위된 국왕은 가족들과 함께 템플 감옥에 유폐된 채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792년 11월 20일, 튈르리 궁전의 ‘철제 서함’에서 미라보와 주고받은 결정적인 서신이 발견되면서 루이 카페(폐위 후의 호칭)의 재판은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프로이센군을 지휘하며 국가에 맞선 브룬스윅 공작과 내통한 혐의로 기소된 것입니다.
루이 16세의 재판은 12월 10일에 개정되어 16일간 진행되었습니다. 재판은 법원의 역할을 맡게 된 국민공회에서 열렸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산악파(Montagnards)는 국왕의 사형을 강력히 요구한 반면, 브리소와 베르니오 등 지롱드파는 형량에 대해 상대적으로 신중한 입장이었습니다. 심의는 사흘 동안 이어졌습니다.
말세르브와 레몽 드 세즈 등 변호인들의 열렬한 변론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근소한 표차로 반역죄와 국가에 대한 음모죄를 인정받아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월 20일, 루이 16세는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을 나누었습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왕태자(도팽), 국왕의 여동생 마담 엘리자베트, 그리고 딸 마담 로얄이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처형 당일의 기록
처형일인 21일, 새벽 5시에 시종 클레리가 국왕을 깨웠습니다. 한 시간 뒤, 피르몽 신부가 감방 안에서 미사를 집전했고, 루이 16세는 그 자리에서 종부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클레리에게 인장과 결혼반지를, 시 관계자들에게 유언장을 넘긴 뒤, 국민방위군 사령관 앙투안조제프 상테르의 호위를 받아 단두대가 세워진 혁명광장(오늘날의 콩코르드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단두대 위에는 집행인 샤를앙리 상송과 네 명의 조수, 그리고 피르몽 신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이 16세는 외투를 벗기고 손을 묶이는 것을 끝내 마지못해 수용했습니다. 그는 군중을 향해 외쳤습니다.
“국민이여, 나는 무죄로 죽는다!”
이어 집행인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신사 여러분, 저는 제가 받은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입니다. 제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다지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의 목소리를 덮기 위해 북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피르몽 신부가 “생루이의 아들여, 하늘로 오르시라!”라고 외친 순간, 받침대가 기울었고 상송이 작동시킨 칼날이 떨어졌습니다. 시각은 오전 10시 22분이었습니다. 군중은 “국민 만세! 공화국 만세!”를 환호했습니다. 하나의 시대가 그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처형 이후, 그 여파
- 루이 16세의 처형과 함께 프랑스는 절대군주제를 영원히 무덤에 묻었습니다. 이 ‘왕살(레지사이드)’은 혁명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상징하는 테러 정치를 예고하는 강력한 징표 중 하나였습니다.
- 루이 16세의 죽음은 프랑스 내부에 거대한 정치적 동요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군주제 국가들이 모인 유럽 전체를 충격에 빠뜨리며 혁명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