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영웅의 도시 바르샤바 봉기 75주년…나치의 잔혹한 진압과 폴란드의 기억

영웅의 도시 바르샤바 봉기 75주년…나치의 잔혹한 진압과 폴란드의 기억

1944년 8월 1일에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는 폴란드인들의 집단적 기억과 역사 의식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나치가 자신들조차 보기 드물 만큼 잔혹한 방식으로 이 봉기를 진압했기 때문이다.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대부분은 민간인이었으며 그중 다수가 집단 학살로 희생되었다. 수십만 명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1944년의 봉기와 그에 대한 폭력적 진압은 오늘날까지도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독일 정치인들이 기념일 행사차 바르샤바를 찾는 일은 그동안 드문 일이었다. 25년 전에는 당시 독일 연방 대통령 로만 헤르초크가 참석했고, 2004년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뒤를 이었다. 슈뢰더 총리는 당시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올해 독일의 하이코 마스 외무장관이 추모 행사에 참석한 것은 긍정적인 발전으로 평가된다.

마스 장관이 초청을 수락한 것은 집권당인 법과정의당(PiS)이 제2차 세계대전 배상 요구를 점점 더 강하게 내세우고 있는 시점이었다. 바르샤바 전직 시장인 레흐 카친스키는 바르샤바가 입은 피해를 450억 달러로 추산한 바 있다.

저항과 테러

1944년 여름, 바르샤바에는 약 1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점령 당국의 탄압은 1943년 봄 유대인 게토 봉기마저 피로 물들면서 한층 강화되었다. 8월 1일, 런던에 자리한 자유 폴란드 망명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4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1만 6,000명의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SS) 병력과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나 독일군은 순식간에 증원되었다. 당시 국방군은 동부 전선에서 후퇴 중이던 참이었다.

"독일인들은 바르샤바를 완전히 부수고 요새로 만들려 했다. 우리는 그들을 저지하고 단 한 시간이라도 빨리 자유를 쟁취하고자 했습니다." 폴란드 최대 참전용사 단체의 수장 레셰크 주코프스키는 15세였던 당시 이 봉기에 직접 참전했던 인물이다.

나치 고위 관료들의 서신에 따르면, 바르샤바 봉기는 오히려 독일의 계획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당시 SS 수장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에게 이렇게 적었다. "총통 각하, 폴란드인들이 하는 짓은 진정한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5~6주 정도 버텨낼 것이고, 그러면 바르샤바 전체가 사라질 것입니다. 1,600만~1,700만 인구를 가진 민족의 두뇌, 즉 지식인 계층이 말입니다." 실제로 봉기 초기 며칠 만에 나치는 이미 1만 5,000명이 넘는 민간인을 처형했다.

외로운 투사들, 무관심한 스탈린

봉기군은 연합국의 지원을 간절히 바랐다. 서방 연합군은 무기와 탄약, 식량을 공수하려 시도했지만 대부분의 낙하 투하는 목표 지점을 찾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동부 전선에서 진격하며 독일군을 무질서한 후퇴로 몰아붙였지만, 바르샤바에 근접하자 비스툴라 강 건너편에서 진격을 멈추고 그저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스탈린은 반공주의 망명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이른바 폴란드 '국내군'을 돕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봉기가 최종 진압된 뒤, 바르샤바는 히틀러의 직접 명령에 따라 완전히 파괴되었다. 건물 10채 중 9채가 폭파되었고, 그중에는 옛 왕궁과 도시의 모든 산업 시설, 비스툴라 강의 모든 다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4년 가을, 폐허 속에 남아 살아가는 사람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

역사적 기억과 망각

공산 정권은 수십 년 동안 1944년의 사건들에 대해 침묵을 택했다. 1989년에야 봉기의 영웅성과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이라는 양면에 대한 진지한 공론화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수십 개의 기념비가 1944년의 항쟁을 기리고 있으며, 상징적인 조치의 하나로 성 요한 대성당을 둘러싼 담장에는 봉기를 기리는 장갑 사슬이 설치되어 있다.


출처: DW(도이체 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