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왕의 독일 군단(King's German Legion, 약칭 K.G.L)은 1803년부터 1816년까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에서 창설된 하노버 출신 부대들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낯선 땅에서 모국어로 싸운 이들은 영국군 최고의 정예부대로 성장했고, 나폴레옹 전쟁의 주요 전역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탄생 배경
1714년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여왕 앤이 후계자 없이 서거하자, 1701년 왕위 계승법에 따라 왕위 계승권은 제임스 1세의 후손들에게 돌아갔다. 그 결과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고, 하노버와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는 같은 군주를 공유하는 동군 연합 관계에 들어섰다. 이 특수한 구도는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막을 내린다. 살리카 법에 따라 여성에게 하노버 왕관을 물려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03년 모르티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하노버 왕국을 침공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하노버 군대는 해산되었지만, 많은 하노버 병사들이 나폴레옹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영국 당국은 이들이 독일어를 사용한다는 점에 착안해, 언어적 편의를 위해 이들을 하노버 단위 부대로 묶어 편성했다.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은 이후 체계적인 모집 제도를 갖추었다. 조지 3세의 아들인 케임브리지 공작은 아버지의 위임을 받아 하노버 영지를 관리하면서, 포고문을 통해 "모든 용감한 하노버인들"에게 자신에게 합류할 것을 호소했다. 아울러 독일 현지에 잠입한 모집 요원들이 지원자의 수송을 조직하고 입대 수당을 지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편제와 규모
하노버 부대들은 영국 육군에 통합되었다. 다만 국왕의 독일 군단 고유의 참모부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단일 지휘 체계 아래에서 작전한 경우는 없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1805년 기준으로 군단은 보병 대대 4개, 용기병 연대 2개, 포병 중대 5개를 보유했으며, 이후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절정기인 1812년에는 총 1만 8천 명에 달해 용기병 연대 2개, 후사르 연대 3개, 열(라인) 보병 대대 8개, 경보병 대대 2개, 포병·공병 중대 6개로 편성되었다.
군단 소속 부대는 모두 정예로 인정받았다. 영국군이 부대 훈련을 주로 부사관에게 맡긴 것과 달리, KGL의 장교들은 병사 훈련에 직접 깊이 관여했다. 이러한 엄격한 훈련 문화가 군단의 높은 전투력을 뒷받침했다.
주요 전역과 전투
1805년 군단 부대들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프랑스와 교전하던 틈을 타 다른 영국군과 함께 하노버에 진입했다. 그러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가 대승을 거두면서 이들은 함선에 다시 올라 철수해야 했다. 대신 이 과정을 추가 모집의 기회로 삼아 병력을 늘릴 수 있었다.
이후 군단은 반도 전쟁 전역에 대거 투입되었다. 코룬나 전투, 부사코 전투, 바로사 전투, 푸엔테스 데 오뇨로 전투, 알부에라 전투, 시우다드 로드리고 공방전, 아라필레스(살라망카) 전투, 부르고스 공방전, 비토리아 전투, 산 세바스티안 공방전 등 스페인 전역의 주요 전투 대부분에 참전했으며, 니벨 전투와 시칠리아 전역에도 이름을 올렸다.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군단 부대들도 해산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귀환하면서 부대 유지가 다시 정당화되었다. 조지 배링의 지휘 아래 KGL 부대는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고, 특히 라 에 생트(La Haye Sainte) 농장 방어전에서 압도적인 열세 속에도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며 군단 역사상 가장 빛나는 페이지를 남겼다.
워털루 이후 군단은 임무를 마치고 1816년 공식 해산되었다. 짧은 존속 기간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독일 군단은 나폴레옹 전쟁기 영국군을 대표하는 정예 부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