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 정신에서 싹튼 저항의 전통
파리 코뮌의 뿌리는 제1공화국과 1792년의 혁명적 파리 코뮌 정부를 회고하는 공화주의 열망, 그리고 제2공화국 시기인 1848년 6월에 일어난 민중 봉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봉기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수립된 정부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진압되었다. 바로 이 시점부터 붉은 깃발은 봉기자들과 바리케이드를 쌓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상징이 되었다. 붉은 깃발은 노동하는 백성들의 피를 상징했고, 삼색기는 탄압과 동일시되었다. 흥미롭게도 붉은 깃발은 원래 혁명기에 계엄령을 알리던 깃발이었는데, 민중은 이 상징을 빼앗아 군주와 군인들을 조롱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왕정과 제정의 반복, 그리고 1870년의 패전
1804년부터 1871년까지 프랑스는 주로 군주정이나 황제정(제1제정, 왕정복고, 7월 왕정, 제2제정) 아래에서 살았으며, 공화정이 실제로 작동한 기간은 극히 짧았다. 1870년 7월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지만, 철저한 준비 부족 탓에 곧바로 패배로 치닫고 말았다. 1870년 9월 4일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음에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파리는 포위당한 채 1870~71년 겨울 극심한 기근을 견뎌야 했다.
휴전 협상과 왕당파 다수의 국민의회
국민방위정부의 외무장관 쥘 파브르는 비스마르크와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15일씩 연장 가능한 적대 행위의 중지 외에도, 전쟁의 지속 여부 또는 강화 여부를 결정할 국민의회 소집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2월 8일 실시된 선거에서는 왕당파가 다수 의석을 차지해 국민의회에 진출했다. 반면 파리에서 선출된 의원들은 전원 공화파였으며, 상당수는 급진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공화국 정부는 파리의 반란에 휩쓸릴 것을 우려해 처음에는 보르도에, 이후에는 베르사유에 자리를 잡았다. 실제로 국민방위정부 시절인 10월 31일에도 정부는 전복될 뻔한 적이 있었다.
티에르 정부와 파리 시민의 불신
2월 17일부터 공화국 정부는 '행정권 수반' 아돌프 티에르가 이끌었으며, 그는 프로이센과 강화 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극심한 포위를 견뎌낸 파리 시민들은 프로이센군으로부터 파리를 지키고 새로운 정치·사회 시대를 열기를 원했으며, 무장 해제를 거부했다. 결국 독일과의 신속한 강화를 원하면서 베르사유로 물러난 왕당파·상류 중산층·지방 보수 세력과, 파리 시민 사이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특히 파리 동부 지구 주민들은 당시의 가혹한 임금과 사회 조건에 시달리던 이들이자, 독일군의 포위가 초래한 기근의 최대 피해자였다.
동서로 분열된 파리의 사회 지형
파리에서 구(區) 단위의 사회적 혼합은 중세 이래의 관습이었지만, 제2제정기의 대규모 도시 개조로 인해 거의 사라졌다. 서부 지구(7구, 8구, 16구, 17구)에는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 수 있는 가장 부유한 파리 시민들이 몰려 있었고, 도심 일대에도 여전히 부유층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면 노동자 계급은 동부(10구, 11구, 12구, 13구, 18구, 19구, 20구)에 집결해 있었다. 186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노동자는 180만 명의 주민 가운데 44만 2천 명에 달했다. 여기에 장인(職人)이 약 7만 명에 이르렀는데, 대부분 혼자 또는 직인 한 명과 함께 일하는 소규모 생산자였다. 영세 상인들 역시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적 처지에 놓여 있었다.
조직되어 가던 파리의 노동자 계급
이러한 대중 계급은 점차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1864년에 인정된 파업권은 제2제정 말년에 널리 활용되었다. 1864년 2월 입법 선거를 계기로 노동자들은 노동의 자유, 신용 접근, 연대를 요구하는 '60인 선언'을 발표했다. 1864년 9월부터는 파리에 대표부를 둔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가 활동했으며, 1868년에는 공화파 시위에 참여한 협회 프랑스 지부가 제정 정부에 의해 해산되기도 했다. 같은 해 제정된 언론 자유법은 은행·보험회사·광산·철도의 '국유화'와 같은 반자본주의적 경제 요구가 공개적으로 표출될 길을 열어 주었다(말롱과 바를랭이 내건 1869년 입법 선거 강령이 대표적이다). 한편 봉기를 주창하는 블랑키스트들도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우리의 혁명'을 빼앗길까 두려운 파리
파리 노동자 계급이 1870년 9월의 '자신들의' 혁명, 즉 제2제정 전복의 성과를 또다시 빼앗길 것을 우려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1830년 7월과 1848년 2월의 혁명적 날들 이후, 그리고 1848년 5월 선거 이후 부유층은 정치 권력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독차지하여 7월 왕정과 제2제정을 수립해 왔다. 1871년 파리 시민들이 2월에 새로 선출된 의회를 의심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의원의 3분의 2가 왕정 복벽을 추진하는 여러 분파의 왕당파였고, 나머지는 보나파르트파였기 때문이다.
의회는 언제든 불붙을 준비가 되어 있는 대중적 파리를 경계하여, 3월 10일 베르사유에서 회의하기로 결정했다. 독일군의 통제 아래, 절대 왕정의 상징이 된 도시에서였다. 더욱이 의회는 일부 파리 시민을 곤경에 빠뜨리는 사회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3월 10일 의회는 어음·임대료·채무에 대한 모라토리엄(상환 유예)을 폐지하기로 결정했고, 이제 3기분의 지불이 즉시 이루어져야 했다. 많은 노동자, 장인, 상인은 생계 수단이 위협받는다고 느꼈으며, 약 15만 명이 파산이나 법적 조치의 위험에 처한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의회는 국민방위군 병사들에게 지급되던 하루 1.50프랑의 급료를 폐지해, 파리 빈곤 계층의 중요한 소득원 하나를 없애 버렸다. 이 정책은 1848년 봄 '질서당'이 지배하던 의회—티에르가 그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가 펼쳤던 정책을 경험한 나이 많은 파리 시민들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무장 해제 명령, 폭발 직전의 도시
정부가 파리 시민의 무장 해제를 결정하자, 그들은 직접적인 위협을 느꼈다. 쟁점은 벨빌과 몽마르트르에 보관된 227문의 대포였다. 파리 시민은 이 대포들을 자신들의 재산으로 여겼으며, 정부군의 잠재적 공격 앞에서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1848년 6월처럼). 그러나 파리 시민의 손에는 무려 50만 정에 달하는 총이 있었다. 결국 1871년 3월 18일 정부군의 대포 탈환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봉기가 촉발되었고, 이것이 3월 28일 파리 코뮌 선포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