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인도를 집어삼킨 폭력적 힌두트바의 물결

인도를 집어삼킨 폭력적 힌두트바의 물결

승리의 세계 삼색기여

인도가 공동체 폭력의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을 무렵, 인도인들에게 자부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서기 1924년 샴랄 굽타 '파르샤드'는 국민회의를 위한 깃발 노래를 지었습니다. 이 노래는 놀라울 만큼 유명해져서, 하모니움과 돌락의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국민회의의 새벽 행진(프라밧 페리)에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승리의 세계 삼색기여, 사랑스러운 우리 깃발은 높이 휘날린다.

힘은 늘 쏟아지고, 사랑은 소용돌이치며,

영웅들의 파괴자요, 조국의 온몸과 마음인 깃발….

자유를 위한 격전 속에서 순간순간 열정으로 커져 갔네,

적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떨리고, 모든 두려움과 괴로움이 사라지리. 깃발….

이 깃발 아래 두려움 없이 스와라지를 쟁취하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결의,

바라트 마타 키 자이를 외치라, 독립이야말로 우리의 좌우명. 깃발….

일어나라! 일어나라, 사랑스러운 영웅이여. 나라와 종교를 위해 희생하라,

모두 함께 노래하라, 사랑스러운 인도여, 우리의 조국. 깃발….

그 영광이 빛나도록, 목숨을 바쳐서라도,

세계에 승리를 보이라, 그때 우리는 서원을 다하게 될 것이다. 깃발….

승리의 세계 삼색기여, 사랑스러운 우리 깃발은 높이 휘날린다.

간디의 추종자였던 자와할랄 네루는 이 노래에서 폭력적인 요소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노래 속에서 거듭 반복되는 '세계 정복'이라는 단어를 몹시 꺼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인도가 독립을 맞을 때까지 국민회의 새벽 행진의 핵심 볼거리로 남았습니다.

이와 함께 뱅킴 찬드라 채터지가 지은 '반데 마타람' 역시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극우파와 혁명가들 사이에서 국민회의 당원들의 첫 번째 선택이 되었습니다. 영국인들보다 무슬림 연맹은 이러한 노래들이 자신들을 겨냥해 쓰여졌다고 느꼈습니다.

벵골에 넘쳐난 공동체 폭동

벵골에서는 힌두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반면 무슬림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거리와 골목길 등 공공장소 곳곳에 모스크가 들어섰습니다. 힌두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 행렬을 위해 신명 나게 모스크 앞을 지날 때마다 무슬림들은 이러한 행렬을 공격하곤 했습니다.

1926년 중반, 전국은 공동체 폭동의 홍수에 휩싸였습니다. 가장 먼저 콜카타에서 끔찍한 공동체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6주 동안 콜카타 거리에서는 잔혹한 살인이 자행되었고, 110곳에서 방화가 일어났으며 사원과 모스크가 공격당했습니다. 정부 성명에 따르면 첫 번째 충돌에서 44명이 사망하고 584명이 부상당했으며, 두 번째 충돌에서는 66명이 사망하고 391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 폭동은 주로 모스크 앞에서 힌두 행렬과 악기 사용을 둘러싸고 벌어졌습니다.

사망자와 부상자 중에는 힌두교도가 더 많았습니다. 당시 인도 총독은 어윈 경이었습니다. 힌두 마하사바는 1926년 5월 22일 델리에서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정부에 콜카타의 힌두교도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힌두 마하사바의 닥터 시브람 문제와 판디트 마다모한 말라비야가 콜카타를 방문했을 때, 벵골의 수라와르디 정부는 두 사람에게 소환장을 발부했습니다.

동벵골의 상황은 한층 더 참담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힌두 여성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납치, 강간, 방화, 살인 사건이 날로 늘어갔습니다. 북벵골의 무슬림들 역시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간파티 축제에 대한 공격

마하라슈트라에서도 간파티 축제 때 행렬을 진행하다가 무슬림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해지자 힌두 마하사바는 전국의 여성들에게 호소하여, 모든 힌두 여성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소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칸푸르의 공동체 폭력

1931년 칸푸르에서 공동체 폭동이 발생하여 수많은 힌두교도들이 학살당했지만, 영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습니다. 이 폭동 와중에 언론인 간네시 샹카르 비디야르티가 1931년 3월 25일 살해당했습니다.

전국을 휩쓴 과격 힌두트바의 물결

말라바르, 물탄, 칸푸르, 마하라슈트라, 벵골, 암리차르 등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공동체 폭동으로 인해, 국가에는 급진적 힌두트바의 물결이 들판쳤습니다. 전국에서 힌두교도에 대한 폭력 사건에 항의하며 힌두 지도자들은 '힌두 에크타(힌두 통일)' 구호를 내걸었고, 전국 곳곳에 힌두 마하사바의 지부가 설립되었습니다.

올 인디아 크샤트리야 사바가 창설되었습니다. 서기 1923년에는 닥터 키츨류가 암리차르에서 탄짐·타블리그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서기 1925년 비자야 다샤미 날, 닥터 헤지와르는 힌두 종교와 카스트, 문화를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바크 상(RSS)을 창설했으며, 그 지부는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서기 1928년에는 라호르에서 '힌두 청년단'이라는 조직이 설립되었습니다. 스와미 다야난다 사라스와티, 스와미 비베카난다, 마하리시 아우로빈도 고시는 독립 인도의 몸에 자긍심이라는 새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과격 힌두트바를 탄생시켰습니다. 랄라 라즈팻 라이, 비핀 찬드라 팔, 발 갱가다르 틸락은 국민회의 내 과격 힌두트바의 기수였습니다. 이들의 기여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 이미 간략히 다룬 바 있습니다.

마하라슈트라 출신의 비나약 다모다르 사바르카르는 틸락 시대의 힌두 민족주의 정신을 한층 더 계승·발전시켰습니다. 그는 힌두교도들 간의 정치적·사회적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힌두교도들의 공동 이익을 앞세워 단결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무슬림을 달래는 데 초점을 맞춘 정책의 지지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바르카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도 무슬림들이 스와라지(자치) 달성에 협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탄원할 필요가 없다. 무슬림 없이도 힌두교도들은 자유를 위해 싸울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을 위한 공동체 정치를 펼치던 지도자들은 사바르카르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빌려, 자신들의 급진적 공동체 정치를 부각시킬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