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의 과학화
자연과학자들이 인류를 여러 '인종'으로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인종차별은 사회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렸다. 인간을 우리 안에 가두어 전시하는 발상이 더 이상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선전 효과까지 더해져, 식민지 지배는 이른바 '야만인'들을 교육하고 문명을 전파하는 선한 행위로 여겨졌다.
19세기 자연과학자들은 흑인과 백인 간의 신체적 차이를 강조하는 이론들을 내놓으며 인종차별을 한층 강화했다. 이들은 식민지 박람회를 계기로 전시된 원주민들을 직접 관찰하고 측정하며,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증명'하려 했다.
조작된 전시회
전시회의 내용은 상당 부분 꾸며진 것이었다. 이른바 '흑인 마을'을 채운 출연자들—아프리카의 고향 마을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에게는 관객 앞에서 배춤춤을 추며 볼거리를 제공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열광하는 대중은 새로운 문화를 발견한 듯 즐겼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유럽 곳곳에서는 수많은 식민지 박람회가 열렸다.
인간을 우리 뒤에 전시한다는 발상은 원래 동물을 전시하던 칼 하겐베크(Carl Hagenbeck)에서 비롯되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여행할 수 없는 유럽인들에게 좋은 볼거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아프리카, 남미, 북방 국가들의 원주민들이 끌려왔고, 기후 적응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생활 조건이 참혹했다. 원주민들은 대개 자발적으로 참여했지만, 그렇다고 합리적인 처우가 보장되거나 임금과 약속된 체류 기간이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원주민은 동물보다 나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식민지 전시회 덕분에 과학자들은 '표본'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오전은 연구자들이 원주민들의 신체를 측정하는 데 할애되었고, 낮이 지나면 일반 관객들이 원주민들을 관람하러 찾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럽인들은 늘 같은 부족, 같은 얼굴에 식상해졌다. 관객의 호기심을 붙잡기 위해 전시는 점점 더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특히 여성들을 알몸으로 내몰고, 출연자들에게 더욱 흉포하게 연기하도록 요구했으며, 전투 춤을 추게 했고, 심지어 원주민들을 '식인종'으로 둔갑시켰다. 디디에 다냉크스(Didier Daeninckx)의 소설에는 주인공들이 어떻게 강제로 연기하고 대중 앞에서 옷을 벗어야 했는지 고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렇게 형성된 왜곡된 원주민 이미지는 식민지 박람회를 끊임없는 연극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허구적 이미지는 백인의 우월한 지위를 부각하고 '타인'과 비교하는 도구로도 활용되었다. 박람회 기간 동안 대중은 원주민들에게 아무런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원주민들은 유럽에서 옮은 병으로 마을 전체에 전염병을 퍼뜨리기도 했다.
경제적 수익
당시 유럽인들은 세계 곳곳을 직접 여행하지 않았기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을 유럽으로 데려와 사람들이 집을 떠나지 않고도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관광 산업은 호황을 누렸고, 선전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안심시키는 역할을 했다. 대중에게는 식민지가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가득해 국가 경제에 이롭다는 인식이 심어졌다.
식민지 박람회의 종말
주목할 점은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병사들을 차출해 최전선에 배치했다는 사실이다. 소설 칸니발(Cannibal)에서 한 아프리카인은 베르됭 전투에서 어떻게 죽음을 모면했는지 이야기한다. 참호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지낸 동안 프랑스 병사들은 인간 동물원이 보여주던 것과는 전혀 다른 원주민의 모습을 접하게 되었고, 원주민들은 심지어 '프랑스의 양자(養子)'라 불리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원주민을 흉포하게 만들어 공포를 조성하는 대신, 문명으로 나아가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쪽이 선호되었다.
전간기에 들어서면서 반식민주의 운동이 목소리를 높였고, 예술가들과 정치인들은 식민지 박람회 보이콧을 촉구했다. 소설 칸니발에는 백인들이 인간 동물원에 맞서 저항하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그 결과 1931년 파리에서 열린 박람회가 마지막 식민지 박람회가 되었고, 이후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