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과 프랑스 혁명
귀족, 즉 아리스토크라시는 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존재해 온 계층으로,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신분 질서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지위와 재산의 우열을 비교하며 서로를 구분해 왔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도 상류 신분인 파트리키(귀족)와 하류 신분인 플레브스(평민) 사이의 구별에서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귀족(noblesse)은 1870년까지 여러 왕들의 통치 아래 귀족으로 인정받거나 귀족 작위를 받은 모든 가문을 의미합니다. 귀족 작위는 '왕관(couronne)'이라고도 불리며, 기사·남작·자작·백작·후작·공작·국왕·황제의 서열로 나뉩니다. 비귀족들에 의해 유지되던 이들은 놀라운 사치 속에서 생활했으며, 그 부는 가톨릭 교회가 차지한 막대한 지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교회 역시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의 분노 대상이 되었습니다.
1789년 이후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귀족은 부르주아지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가난한 민중들이 일으킨 혁명으로 프랑스의 귀족 세력은 급격히 몰락했습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른 고위 귀족들과 함께 단두대에 처형되었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재산을 프랑스에 남겨둔 채 해외로 피신했습니다. 남은 귀족들은 더 이상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해야 했으며, 프랑스에 잔류한 이들은 점차 부르주아가 되어갔습니다. 이들 귀족 중에는 구체제(Ancien Régime)로의 회복을 갈망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예속된 농민과 풍요롭던 귀족 시절을 그리워한 이들을 우리는 울트라(ultras)라고 부릅니다.
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19세기는 부르주아지의 전성기였습니다. 이들은 정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점진적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프랑스 혁명 이후 귀족을 대신한 지배 계급, 곧 자본주의 체제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부르주아지 내부도 층위로 나뉘었습니다. 장사가 잘 되는 소상인들로 이루어진 소부르주아지(petite bourgeoisie), 의사·변호사·문학 종사자 등 전문직과 지식인으로 구성된 중산 부르주아지(moyenne bourgeoisie), 그리고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한 은행가와 산업혁명의 수혜로 점점 부유해진 실업가·기업인 가문들, 즉 자유주의를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상류 부르주아지(haute bourgeoisie)가 그것입니다.
자유주의는 정치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계몽주의 철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란 타인의 이익이 아닌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집중함으로써 업무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두는 방식이며, 기업 역시 여기서 경제적 성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외부의 제약 없이 완전한 자유 속에서 노동이 이루어지도록 허용했고,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강화된 사상의 자유 또한 이 철학이 지향하는 가치였습니다.
귀족들과 달리 부르주아들은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이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 결과를 더욱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방임주의(laissez-faire)를 선택하고 시장의 자율 조절을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기업 경영자들이 이 철학을 활용한 방식에서 그 부정적인 면이 드러납니다. 행동의 자유를 내세운 결과, 노동자들은 더 나은 성과를 위해 항상 더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돈은 거벌지 못했고, 국가가 강제하는 규칙이 부재한 가운데 노동 환경은 완전히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 계급, 즉 가장 많이 착취당한 계층을 일컫는 말로, 당시 인구의 대다수가 여기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로, 고용되거나 실업 상태였으며 종종 낡고 비위생적인 건물에 빼곡히 모여 살았고, 때로는 오늘날의 빈민가에 해당하는 위험한 동네에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농민들은 19세기에 우후죽순 생겨난 수많은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아 프롤레타리아가 되었지만, 곧이어 그 시절 끔찍한 노동 조건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대다수 산업가들은 방임주의를 신뢰하며 정부의 경제 개입에 반대했습니다. 나름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가난이 술주정, 게으름, 느슨한 도덕성의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1850년 무렵, 여러 차례 실패로 끝난 파업과 시위 끝에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조합은 무엇보다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임금을 인상했으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더 큰 정의가 확립되도록 사회주의 사상을 지지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에게 노동자란 값싼 상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기계가 발달하면서 노동자는 기계를 '보완'하는 부속품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꾸기 위해 그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가 정의를 회복하고 사회적 격차를 없애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여기서 마르크스주의(Marxism)가 탄생했습니다.
사회주의는 농촌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존재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적으로 노동자를 위해 등장해 그들의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강력히 반대하며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상과 결합하여 사회 계급의 소멸과 인간 사이의 불의 제거를 추구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 계층
20세기에 들어서며 사회 계층은 그 중요성을 잃어갔습니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기간에도 직업과 개인의 재산에 따른 사회적 격차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정당의 형태로 제도화되어 자유주의 진영은 우파로, 사회주의 진영은 좌파로 자리 잡았습니다. 1933년 독일에서는 나치즘(국가사회주의)이 등장했고, 히틀러 총리는 저소득층에게 1929년 경제 위기의 종식을 약속하며 지지를 모았습니다. 현재 프랑스에는 좌파 진영의 중심인 사회당이 존재합니다.
오늘날 사회 계층은 더 이상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일부 가문은 조상의 귀족 작위를 간직하고 있지만, 물려받은 유산 정도를 제외하면 이것이 재정 상태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습니다. 현대의 사회적 격차는 연봉과 직장 내 서열에서 드러나긴 하지만, 과거처럼 명목상의 신분으로 규정되거나 일상에서 공식적으로 고려되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