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검은 군단'… 조국을 배반한 독일 용병들과 그들의 처참한 최후

 검은 군단 … 조국을 배반한 독일 용병들과 그들의 처참한 최후

검은 군단(Black Legion)은 1514년 작센 공작 게오르크가 경쟁 상대인 프리슬란트 백작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창설한 독일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 용병 부대였다. 원래 이름은 '검은 근위대(Black Guard)'였다.

배신자들의 집단으로 불린 용병 부대

검은 근위대는 1514년 동프리슬란트 전역에 투입되어 지나간 자리마다 재와 시신, 폐허만 남겼다. 1515년 작센-프리슬란트 전쟁이 종결되자 프랑스 국왕이 이들을 고용했다. 이후 12,000명의 란츠크네히트가 추가로 합류하면서 부대는 '검은 군단'으로 개편되었고, "배신자들의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부대였다.

독일 황제는 용병들에게 프랑스군 복무를 떠나 '모국' 독일로 돌아올 것을 호소했지만, 대다수는 이를 무시하고 프랑스의 금화를 택했다. 1515년 기준 군단의 병력은 총 17,000명으로, 긴 창(파이크)병 12,000명, 아르케부스 화승총 사수 2,000명, 양손 대검 병사 2,000명, 창과 낫으로 무장한 병사 1,000명으로 구성되었다. 군단은 500명 단위의 '중대'로 편성되었으며, 지휘관은 독일인 게오르크 랑엔만델(Georg Langenmandel)이었다.

이탈리아 전쟁과 스위스와의 피할 수 없는 혈전

군단은 곧바로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벌이던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했다. 군단은 마리냐노 전투에서 당대 무적이라 일컬어지던 스위스 창병들과 맞서 분전했다. 란츠크네히트와 스위스 용병 사이에는 극심한 증오가 존재했는데, 포로가 된 자들은 최선의 경우 목이 잘리는 신속한 처형을, 최악의 경우 잔혹한 고문 끝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파비아 전투: 조국과 마주하다

1525년 파비아 전투는 군단의 운명을 결정짓는 국면이었다. 새로 즉위한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소집에 많은 독일인들이 프랑스군을 떠났지만, 약 5,000명의 독일인은 여전히 프랑스 깃발 아래에 남았다. 그들은 프랑수아 드 로렌(François de Lorraine)과 리처드 드 라 폴(Richard de la Pole) 같은 프랑스 귀족들의 지휘 아래, 같은 민족인 독일인들과 싸우게 되었다.

군단의 최후

1525년 프랑수아 1세는 2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 도시 파비아를 포위하고 있었다. 2월 24일, 독일·스페인·이탈리아 병력으로 구성된 비슷한 규모의 제국군이 그를 향해 진격했다. 제국군은 야행을 감행해 프랑스군을 기습했고, 검은 군단은 공격자를 저지하기 위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러나 행운은 나라 없는 용병들에게 미소 짓지 않았다.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Georg von Frundsberg)가 지휘하는 동포 란츠크네히트와의 전투에서 군단은 완패했다. 전투 전 군단의 실질적 지휘관 랑엔만델은 프룬즈베르크에게 결투를 청했으나, 응답 대신 적군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제국군 독일 병사들은 배신한 동포들에게 분노를 터뜨려 한 명도 남김없이 베어 죽였고, 프랑스군 역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포로로 잡힌 불운한 자들은 이후 순교자와 다름없는 잔혹한 죽음을 맞았다. 그들의 배신은 결코 용서될 수 없었다. 프랑스 국왕 또한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흥미롭게도 군단은 이후 재건되었다. 4,000명 규모의 일반 란츠크네히트 연대로 개편된 군단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다시 한번 독일군과 싸웠지만, 1528년 또다시 궤멸당했다. 이번에 살아남은 병사들은 독일 제국군에 합류하며 부대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검은 군단 … 조국을 배반한 독일 용병들과 그들의 처참한 최후

검은 군단. 미니어처로 재현한 모습.

 검은 군단 … 조국을 배반한 독일 용병들과 그들의 처참한 최후

파비아 전투. 좌측에서 검은 군단이 독일 란츠크네히트를 저지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