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국 시카고의 폭발적인 분위기는 미국 전역을 매료시켰고, 억눌려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배출구가 되어 주었다. 밤새도록 스테이트 스트리트에는 맥주 운반 트럭이 오가는 소리 사이로 재즈 선율이 울려 퍼졌다. 동이 틀 때까지 갱스터들의 차량은 긴 행렬을 이루며 도시의 대로를 누비고 다녔다.
법이 무너진 도시, 시카고
조직들이 '토르피도'라 불리는 암살자들을 앞세워 청산 작전을 본격화하던 무렵, 존경받던 시민들은 오히려 지하 세계의 왕들과 어울리며 밤거리를 활보하는 취미를 즐겼다. 상류층에게 손님과 술손님으로 붐비는 나이트클럽에서 "안녕, 알!"이라고 외칠 수 있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명예로운 인정, 곧 사회적 축성으로 여겨졌다.
정치인들은 범죄 조직과 공공연하게 어울렸다. '개방 도시' 원칙을 내세웠던 시카고 시장 '빅 빌' 톰슨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담대하게 이렇게 선언하기까지 했다. "우리 도시는 대서양 해저 바닥만큼이나 젖어 있다!"
선거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기보다 오히려 전복 전쟁에 가까웠다. 법치주의는 통제 불능의 폭력 앞에서 잦아들었고, 시카고 대학교의 한 교수는 이렇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봉건주의로 빠져들고 있다."
기소 한 건 없었던 227건의 살인
갱스터들은 시청을 장악했고, 판사들마저 그들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1927년부터 1931년까지 범죄 조직 내부에서 저질러진 살인만 무려 227건에 달했지만, 기소된 건 단 한 건도 없었다.
상류층은 가장 유력한 갱 두목들이 주최하는 화려한 리셉션에 빈짖으로 참석했고, 도시 전체는 범죄 영웅들의 사치스러운 장례식에 운집했다.
충격적인 통계
1925년 시카고의 인구는 약 300만 명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 만취 상태로 검거된 사람이 16,000명에 달해, 인구 4,000만을 넘는 영국 전체의 검거 수보다 많았다!
1927년에는 1920년과 비교해 음주로 인한 범죄가 427%,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사망이 600%나 증가했다. 금지령 선포 후 단 1년 동안 미국에서 소비된 술은 알코올 약 9억 리터, 맥주 30억 리터 이상, 포도주 5억 3천만 리터에 이르렀다.
1932년 한 해에만 갱스터와 지하 양조업자 등 2,000명이 '임무 수행 중' 목숨을 잃았으며, 징세위원회 소속 500명의 단속관이 암살당했다.
부패가 완성한 시스템
밀주가 남긴 막대한 이익은 정계의 부패를 낳았고, 그 부패는 다시 이 거대한 불법 시스템의 완벽한 작동을 보장했다. 법치주의와 헌법에 대한 존중을 되찾으려면, 강력한 여론 운동이 떠받치는 과감한 조치가 필요했다.
대공황이 가져온 결정타
마침내 월스트리트 대폭락, 즉 1929년의 경제 위기가 갱스터즘과 밀주에 치명타를 날렸다. 경제 파탄은 범죄 조직의 군자금으로 흘러 들어가던 돈줄을 말려버렸고, 금지령 그 자체의 운명마저 끝장냈다.
'건조한 통치' 14년이 지난 뒤, 국민은 '맑은 생각과 깨끗한 생활'의 시대, 그리고 후버가 내걸었던 '위대한 경제·사회 실험'의 결과에 질려 있었다. 1932년 대선 운동에서 금지령 반대파는 당선 무효를 노리듯 현직 대통령을 맹공격했고, 후버는 이미 골칫거리인 금지령 문제를 공약에서 빼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뉴딜(New Deal), 그리고 모두에게 한 잔의 맥주를!"이라는 구호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승리했다.
금지령의 종언, 그리고 남겨진 유산
1933년 12월 5일, 수정헌법 제21조가 금주법(Prohibition)에 최종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1919년 제정됐지만 결코 집행될 수 없었던 그 법이 남긴 폐해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처음에는 아무도 예감하지 못했다. 모두가 '구름 없는 신혼여행'처럼 순탄할 것이라 믿었던 금주법의 나날은 결국 폭력과 부패의 악몽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마피아와 갱 조직의 막강한 권력은, 그 슬픈 시절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무거운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