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초의 세속 기사단인 성 게오르기우스 기사단(Order of Saint George)은 1326년 헝가리의 앙주 왕 카를 1세(Charles I)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설립 헌장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만, 실제 운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1330년 11월, 비셰그라드(Visegrád) 궁정에서 왕 암살 미수 사건과 카를 1세의 군대가 블라키아의 보이보드 바사라브 1세(Basarab I)에게 포사다 전투(Battle of Posada)에서 패배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기사단은 돌연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전투에서 왕의 기사 한 명이 자신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을 왕과 바꿔 입고 왕을 대신해 전사한 일은, 그가 갓 설립된 기사단 소속이었기에 가능한 영웅적 행동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단원 명단이 기록되지 않아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지기스문트와 두 기사단의 대조
카를 1세의 손녀 마리아와 결혼한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Sigismund of Luxembourg)는 1387년 헝가리 왕에 올랐으며, 이후 보헤미아 왕(1419), 로마 왕(1411), 신성 로마 황제(1433)를 겸했습니다. 부친 카를 4세 황제의 궁정에서 기사도적 분위기를 익힌 그는 1419년 형 벤체슬라우스 4세 사후 수건 기사단(Order of the Towel)의 수장이 되어 단원 임명권을 행사했습니다. 선조 카를 1세가 세운 성 게오르기우스 기사단의 존재를 알았을 법도 하지만, 1425년 비셰그라드에 그 기사단의 예배당이 이미 폐허가 되었다는 기록만 남았을 뿐입니다.
두 기사단의 유사성은 여기까지입니다. 카를 1세의 기사단이 공식 본부, 정해진 인원, 엄격한 정기 모임을 갖춘 진정한 공동체를 지향했다면, 지기스문트가 1408년 12월 12일 두 번째 아내 체일레의 바르바라(Barbara of Celje)와 함께 창설한 용의 기사단(Order of the Dragon)은 정반대였습니다. 공식 수호성인도, 전용 예배당도, 정기 모임도, 기사도적 이상도 없었습니다. 단지 단원의 장례식에 참석하거나 30번의 미사를 바치고 하루 동안 애도복을 입는 의무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불턴(D'Arcy J. Boulton) 교수의 지적대로 이 기사단은 "오로지 정치적 목적만으로 구상된 최초의 조직"이었습니다. 전장에서 잃은 것을 협상 테이블에서 되찾는 데 능했던 지기스문트다운 발상이었습니다.
창설 목적과 회원 구성
설립 헌장 전문에 따르면, 라틴어로 Societas draconica seu draconistarum이라 불린 이 기사단의 목적은 명확했습니다.
- 1등 단원 24인(기사단장인 국왕 부부 포함): 국왕 부부와 그 자녀(태아 포함)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고, 서로를 모든 침략으로부터 방어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 대가로 국왕의 특별 보호와 재판상 특권을 누렸습니다.
- 무제한 2등 단원: 내외국인 모두에게 개방되어 영향력 네트워크를 짜는 데 유용했습니다. 왕국의 고위 귀족 외에 하급 귀족도 포함되어, 로즈고니(Rozgonyi) 가문이나 바토리(Báthory) 가문처럼 기사단 가입을 발판 삼아 출세한 가문도 나왔습니다. 바토리 가문은 나중에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다스리고 폴란드 왕위까지 차지했습니다.
1등 단원 명단은 거의 변동이 없었습니다. 1423년 헝가리-폴란드 평화 조약에 찍힌 22명 헝가리 귀족의 인장 중 10개가 설립 헌장의 것과 일치합니다. 기사단의 명성은 엘리트를 넘어 사회 전체로 퍼져, 벽난로 타일에 용 문양이 유행할 정도였습니다.
반오스만 전선과 블라드 체페슈
헝가리 입장에서 이웃 나라 통치자들은 왕실의 봉신이었습니다. 세르비아와 블라키아는 정교회 국가였지만, 기사단원으로서 지기스문트가 주도한 반오스만 외교 정책에 동참하며 헝가리의 안보 완충지대를 형성했습니다. 보스니아의 흐르보예 브크치치(Hrvoje Vukčić Hrvatinić)는 가장 골치 아픈 동맹이었습니다. 1408년 도보르(Dobor) 전투에서 지기스문트가 그를 꺾은 것이 기사단 창설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흐르보예는 이듬해 기사단에 가입했으나 1413년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국왕은 그의 모든 작위와 영지를 박탈하면서도 기사단원 자격만은 남겨두는 기묘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블라키아에 대한 압박도 집요했습니다. 기사단원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단연 블라드 3세 체페슈(Vlad III Țepeș), 역사 속의 드라큘라입니다. 그는 두 차례 보이보드를 지낸 블라드 2세 드라쿨(Vlad II Dracul)의 아들로 1431년 기사단에 들어갔습니다. 훗날 헝가리 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의 군사 지원을 받았으나, 1462년부터는 국왕의 조카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헝가리에 사실상 가택 연금되었습니다. 그의 거처는 루마니아 시기쇼아라(Sighișoara, 옛 세게슈바르)와 헝가리 페치(Pécs)에서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으며, 페치의 집은 1489년까지 '드라쿨라의 집(Drakwlyahaza)'으로 불렸습니다.
그 밖에도 덴마크 왕 에리크,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시인 오스발트 폰 볼켄슈타인, 잉글랜드 왕 헨리 5세, 알바니아의 영웅 스칸데르베크(아라곤의 알폰소 5세로부터 수여) 등 수많은 외국 출신 명사들이 외교적 선물로 기사단 칭호를 받았습니다. 단원 수가 많았음에도 기사단 가입은 큰 영예로 여겨져, 초상화, 문장, 특히 묘비에 용 문양을 새기는 일이 오스트리아, 달마티아, 슬로베니아, 독일, 스위스, 실레지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널리 확인됩니다.
운영과 정치적 활용
1433년 황제 대관식을 앞두고 지기스문트는 교황에게 정관 수정을 청원해 기사단의 초국가적 성격을 부각했습니다. 수정안은 단원의 외형 요건을 완화하고, 기사단을 위해 싸우는 단원에게 십자군 특권을 약속했습니다. 지기스문트는 평생 용 문양을 자신의 통치 상징으로 삼았으며, 1416년 콘스탄츠 공의회 때 포르투갈 문헌 Livro de Arautos에 그의 문장과 함께 용 문양이 등장하고, 1433년 황제 즉위 후에는 대인장(Great Seal)에도 새겨 넣었습니다.
기사단 의식은 창설 목적인 정치적 목적을 잊지 않았습니다. 1412년 지기스문트는 단원들에게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4세와의 전쟁 참전을 호소했습니다. 설립 헌장에 명시된 단원 간 분쟁 중재 조항도 실제 작동했는데, 보헤미아의 하인리히 폰 플라우엔과 알소 폰 슈테른베르크 백작의 분쟁이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이탈리아 출신 29명 단원의 서명으로 해결된 것이 대표적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흐르보예 본인도 1413년 이 중재 조항을 거론하며 국왕에게 호소한 바 있습니다.

기사단 휘장과 변형
왼쪽 가슴에 끈으로 매단 휘장에는 여러 변형이 있었습니다. 대다수 단원은 단순한 용 문양을, 남작급 이상 단원은 십자가에 감긴 용과 라틴어 표어 O quam misericors est deus, justus et pius(오, 하느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며 경건하신가)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금직물이나 자수로 만든 브로치 형태였으며, 갑옷에 부착하기도 했습니다. 최고급 휘장은 저당 잡히기도 했는데, 지기스문트 자신도 1416년 브뤼주에서 현금이 필요하자 가터 기사단(Order of the Garter) 휘장을 맡기고 윈저 성당에 은으로 용을 장식한 검을 헌납했습니다(현재 요크 소장).
쇠퇴와 부활, 그리고 현대의 유산
지기스문트 사후 기사단의 명맥은 딸 엘리자베트와 사위 알브레히트 2세(합스부르크, 재위 1437~1439), 손자 라디슬라우스 5세(1444~1457), 그리고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재위 1458~1490)에게로 이어졌습니다. 로마 왕 프리드리히 3세(합스부르크)도 조카 라디슬라우스 5세의 섭정 자격으로 단원을 임명했습니다. 마티아스 사후에도 야기에우워 왕조 폴란드 왕들의 문장에서 용 문양이 확인되지만, 당시엔 이미 헝가리 왕권과의 연결고리를 잃은 귀족 친목 단체로 변질된 상태였습니다.
1764년 라이프치히에서 첫 연구서가 출간되며 기사단은 중부 유럽의 공통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05년 자그레브에서 지식인들이 크로아티아 용 형제단(Croatian Dragon Brotherhood)을 결성해 문화 단체로 활동하다 1946년 공산 정권에 의해 금지되었고, 1990년 재결성되어 오늘날 성 게오르기우스 상이 서 있는 광장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세르비아에서는 2011년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왕세자가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전사한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주권 용 기사단(Sovereign Military Order of the Dragon)을 베오그라드에 설립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 붕괴 후 헝가리는 훈장 제도 개편을 시도하며 1920년 용 기사단 부활을 진지하게 검토했으나 무산되었습니다. 지기스문트는 군사적 패배만 부각되고 외교적 업적은 외면받아 헝가리에서 평가가 나빴으나, 1980년대 이후 두 차례 국제 전시회(1986, 2006)를 계기로 재평가되어 오늘날 '가장 위대한 헝가리 군주'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용 기사단도 그의 긴 통치기를 지탱한 기둥으로 인정받아, 지기스문트의 유해가 안치된 나지바라드(현 루마니아 오라데아)의 성 라디슬라우스 대성당에서 헝가리 지부가 재출범했습니다.
참고 문헌
- Boulton, D’Arcy J. (1987): The Knights of the Crown: The Monarchical Orders of Knighthood in Later Medieval Europe 1325–1520. London, 1987 (2nd ed. 2000).
- Lővei, P. (2006): „Hoforden im Mittelalter, unter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s Drachenordens“. In: Sigismundus Rex et Imperator: Kunst und Kultur zur Zeit Sigismunds von Luxemburg 1387-1437. Ausstellungskatalog; Budapest, Szépművészeti Muzeum, 18. März – 18. Juni 2006; Luxemburg, Musée National d’histoire et d’art, 13. Juli – 15. Oktober 2006. Ed. Takács, I. Mainz, S. 251-263. (프랑스어판도 출간).
- Studničková, M. (2009): „Drehknoten und Drachen. Die Order Wenzels IV. und Sigismunds von Luxemburg und die Polysemantik ihrer Zeichen.“ In: Kunst als Herrschaftsinstrument. Böhmen und das Heilige Römische Reich unter den Luxemburgern im Europäischen Kontext. Ed. Fajt, J., and Langer, A. Berlin – München, S. 377–389.
- Zsombor, J. (2016): „Armorials and Grants of Arms: Heraldic representation of Hungarian nobles at the time of the Council of Constance“. In: Das Konzil von Konstanz und Ungarn. Ed. Bárány, A. Debrecen, S. 155-180.
본 기사는 Desperta Ferro Antigua y Medieval 제53호에 게재되었으며, 차기호인 제54호 '블라드 체페슈. 드라큘라'의 예고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