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회의는 1814년 11월 11일부터 1815년 6월 9일까지 열린 국제 회의로, 나폴레옹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브라질에도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이 내려졌습니다. 포르투갈이 점령했던 가이아나가 프랑스에 반환되었고, 노예 무역이 공식적으로 규탄되었습니다.
비엔나 회의가 만든 외교적 질서 덕분에 유럽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00년간 대규모 전면전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비엔나 회의의 배경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정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직후인 1814년 3월, 샤몽 조약(Treaty of Chaumont)에 서명했습니다.
같은 해 4월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왕위에서 퇴위하여 이탈리아 연안의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이후 승전국들의 초청으로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등 다른 국가들도 조약에 합류하게 됩니다.
샤몽 조약은 모든 정부가 빈에서 개최될 국제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도록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보나파르트가 엘바 섬을 탈출하여 적들을 격파하려고 워털루 전투를 일으키는 돌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 전략은 실패로 끝났고, 황제는 다시 퇴위한 뒤 영국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신성 동맹
비엔나 회의가 개최되기 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신성 동맹(Holy Alliance)의 창설을 제안했습니다. 이 동맹은 처음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3개국으로 구성되었고, 훗날 영국이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이에 따라 네 나라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점령했던 영토의 미래에 관한 결정을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의 반발에 직면하면서, 9월 24일로 예정되어 있던 비엔나 회의 개회식은 11월 11일로 연기되었습니다.
비엔나 회의의 목표
비엔나 회의의 최우선 목표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반도, 독일 각국의 국경을 다시 획정하고, 프랑스·스페인·나폴리 왕국에 부르봉 왕가를 복원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동시에 미주 식민지에서의 노예 무역 폐지와 노예 노동 문제도 논의되었습니다.
비엔나 회의의 주요 결정 사항
비엔나 회의의 주요 결정으로는 유럽 영토의 재편과, 새로운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프랑스의 고립 정책이 있습니다.
영국
영국은 프랑스가 점령했던 영토인 모리셔스, 토바고, 세인트루시아를 배상금으로 받았습니다. 또한 네덜란드로부터 실론(스리랑카), 스페인으로부터 트리니다드 섬을 할양받았습니다.
여기에 몰타와 이오니아 제도 같은 섬들도 왕국 영토에 편입했습니다.
영국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패배로 얻은 최대 승자였습니다. 강화가 체결된 후 영국은 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새로운 영토 정복에 나섰습니다.
프랑스
파리 조약을 통해 부르봉 왕조가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를 옹립하며 프랑스의 왕좌로 복귀합니다.
프랑스 영토의 일부는 3년간 신성 동맹에 의해 점령되었고, 프랑스는 승전국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영토 면에서 프랑스는 1791년 당시의 국경선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로부터 가이아나, 스웨덴으로부터 과들루프, 영국으로부터 마티니크와 부르봉 섬(현 레위니옹)을 되찾았습니다.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함께 전쟁 이후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습니다.
베네치아, 롬바르디아, 밀라노 등 이탈리아 반도 북부 영토를 차지했으며, 일리리아의 3개 주, 달마티아, 카타로 항구도 확보했습니다.
또한 폴란드의 갈리치아를 오스트리아에 병합했지만, 티롤과 잘츠부르크는 독일 지역으로 넘겨졌습니다.
독일 국가들
보나파르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국 중 하나인 신성 로마 제국을 소멸시켰습니다.
비엔나 회의에서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영토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독일 연邦(German Confederation)이 창설되었습니다. 이로써 독일 국가의 수는 약 300개에서 39개로 줄어들었습니다.
프로이센
프로이센은 여러 독일 국가를 흡수하며 게르만 문화권의 최강국이 되었습니다.
작센의 절반, 베르크 대공국, 베스트팔렌 공국의 일부를 받았고, 쾰른, 트리어, 아헨 같은 도시들도 손에 넣었습니다.
여기에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의 일부를 통합하고 폴란드 영토도 병합했습니다.
러시아
러시아는 바르샤바 대공국이라는 명목으로 폴란드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한편 크라쿠프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공동 보호 아래 자유 도시가 되었습니다.
핀란드와 베사라비아(현 몰도바)는 러시아 영토 내에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폴란드
폴란드는 독립을 상실하고 러시아와 프로이센 사이에 분할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지역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제들에게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구왕조를 왕좌에 복원하고 새로운 국가를 창설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통치하던 페르디난도 4세는 두 왕국이 통합된 '양시칠리아 왕국'의 군주로 다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바다로 통하는 출구를 확보하고자 했던 오스트리아는 해안 지역과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사르데냐 왕국은 제노바 공화국을 편입하여 프랑스를 견제할 수 있는 강한 국가로 거듭났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례는 나폴레옹의 전처인 황후 마리 루이즈입니다. 그녀는 파르마, 피아첸차, 과스탈라의 여공작이 되었고, 그 대신 아들 나폴레옹 2세는 빈 궁정에서 교육받기 위해 보내졌습니다.
포르투갈
비엔나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을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으로 격상시켰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순간부터 브라질은 공식적으로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니게 됩니다.
포르투갈은 가이아나에서 철수해야 했고, 이 영토는 프랑스로 반환되었습니다.
스페인
스페인에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왕위를 양보했던 페르난도 7세의 통치가 재건됩니다. 스페인은 카리브해의 트리니다드 섬을 영국에 빼앗겼습니다.
노예 무역
1815년 2월, 비엔나 회의는 노예 무역이 기독교 및 유럽 문명과 양립할 수 없다고 규탄했습니다.
이 결정은 브라질의 노동력이 주로 노예에 의존했던 만큼,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 계기로 대서양 노예 무역을 제한하는 최초의 법률들이 제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비엔나 회의의 결과
참가국들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대체하는 새로운 유럽 정치 질서를 창설했습니다.
나폴레옹 제국 시기의 점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15년부터 1822년 사이에는 국가 간 협력에 기반한 질서가 등장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처음 등장한 모델이었습니다.
새로운 체계는 유럽 각국 간의 세력 균형을 추구하며, 동맹 정책과 영토 배상을 통해 이를 실현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엔나 회의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유럽은 100년 후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전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