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호치민: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그의 생애와 유산

호치민(Hồ Chí Minh, 1890년 5월 19일 ~ 1969년 9월 2일)은 '계몽하는 자'라는 뜻을 담은 이름으로, 본명은 응우옌싱꿍(Nguyễn Sinh Cung)입니다. 그는 후에에서 약 360km 떨어진 논밭이 펼쳐진 황쭈 마을에서 태어난 베트남의 정치가이자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건국자입니다. 1975년에는 그의 이름을 따라 옛 사이곤이 '호치민시'로 개칭되었습니다.

유년기와 청년 시절

호치민의 아버지는 안남 보호령 행정부의 관료였습니다. 베트남 공산당 역사학자들과 프랑스 식민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새로운 식민 지배 세력에 의해 직위를 박탈당했고, 이후 점차 알코올 의존이 섞인 우울증에 빠져 몰락해 갔다고 전해집니다. 식민지의 부당함으로 인한 아버지의 몰락은 어린 호치민에게 깊은 상처와 각인을 남겼습니다.

그는 처음에 후에의 꾸억학(Quốc Hoc, '국립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이 학교는 훗날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되는 응오딘지엠의 아버지가 설립한 곳입니다.

서방에서의 생활

호치민은 1914년부터 1919년까지 런던에서, 이후 1921년부터는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사진 현상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 판쩌우찐(Phan Châu Trinh)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식민지에 민족자결권을 적용하지 않은 것에 크게 실망하고 만니다.

공산주의로의 전환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당시 인류지(L'Humanité)의 편집장이었던 마르셀 카셍(Marcel Cachin)을 통해 공산주의를 접하게 됩니다.

1920년 12월 25일 열린 투르 대회에서 그는 식민지 문제에 대한 연설을 통해 프랑스 공산당의 창당 멤버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1923년 5월, 프랑스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인 응우옌아이꾸억(Nguyễn Ái Quốc, 호치민의 당시 이름)과 장 크레메(Jean Cremet)는 드미트리 마누일스키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코민테른의 활동에 참여했고,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베트남 내 조직망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이후 1927년 4월 장제스의 상하이 반공 쿠데타 이후, 그리고 1936~1937년에 걸쳐 소련을 여러 차례 오갔습니다.

1930년, 그는 마오쩌둥의 도움을 받아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포괄하는 인도차이나 공산당(PCI)을 창당했습니다. 이어 1941년에는 일본 점령군과 프랑스 식민 세력에 동시에 맞서 싸우는 베트남 독립동맹(Việt Nam Độc Lập Đồng Minh Hội, 줄여서 '비엣민')을 창설했습니다. 같은 해 베트남으로 돌아와 일본 점령에 대한 저항 투쟁을 시작했으며, 1942년부터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중국 국민당에 체포되어 중국에서 약 1년간 감옥 생활을 겪어야 했습니다.

독립 선언

석방된 호치민은 8월 혁명을 이끌며 독립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1945년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고, 같은 해 9월 2일 바딘 광장에서 나라의 독립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듬해인 1946년 1월 6일에는 제헌의회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인도차이나 전쟁

장 생테니(Jean Sainteny)와의 협상이 결렬된 후, 호치민은 비엣민을 이끌고 프랑스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비엣민은 프랑스군의 요새 진지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며 인도차이나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습니다.

베트남의 분단

전투 다음 날, 베트남 외무장관 팜반동(Phạm Văn Đồng)이 참여한 인도차이나 관련 협상이 제네바 회의에서 시작되었고, 이는 제네바 협정 체결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두 개의 군사 집결 지역으로 잠정 분단되었습니다.

  • 북부: 베트남 인민군
  • 남부: 극동 프랑스 원정군(CEFEO)

베트남 전쟁

호치민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보다이 황제가 퇴위한 뒤 남베트남 공화국을 이끄는 응오딘지엠에 맞서, 국가 통일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1960년부터 호치민과 그의 동지들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FNL)의 창설을 지원했습니다. 이 조직은 곧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 측으로부터 '비엣콩(Việt Cộng)'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북베트남으로부터 병력, 무기, 장비를 지원받았습니다.

죽음과 유품

호치민은 1969년 9월 2일, 베트남에서 전쟁이 한창이던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9월 2일 국경일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하루 뒤인 9월 3일에 발표되었습니다.

호치민은 자신의 유해를 나라의 남북으로 흩뿌려 달라고 유언했으며, 레닌처럼 방부 처리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유해를 안치하기로 결정했고, 유해를 뿌리는 일이 끝내 실현되지 않으면서 그의 미라는 오늘날까지 하노이 바딘 광장의 호치민 영묘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미지와 선전 활용

생전에 호치민은 자신의 이미지를 활용한 '소련식' 선전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에는 공산주의 동료들이 그의 미라를 권력의 정당성과 체제의 이익을 강화하는 상징으로 활용했습니다.

'호숙부(Bác Hồ, 호 삼촌)'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베트남 애국심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한 그의 이름은, 통일 이후 남베트남의 수도를 새롭게 명명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이곤은 1975년 신생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호치민시(Thành phố Hồ Chí Minh)'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