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베트남 상공의 공중전은 미국 정치 지도부가 채택한 '보복'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물이었다. 미국은 대규모 폭격만으로 북베트남을 '무릎 꿇릴 수 있다'고 계산했다. 조직적인 방공 체계 없이는 미국의 제공권에 도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피 흘리는 대가 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두 가지 공습 전략
이러한 전제 아래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은 두 방향으로 계획되었다. 첫 번째는 다수의 항공기를 투입해 지속적으로 대규모 공격을 가하는 전술이었고, 두 번째는 적의 군사적·정치적 반응에 따라 단계적으로 강도를 높여가는 확대 공중전이었다.
특히 후자는 적이 미국 또는 남베트남 목표물을 공격할 때마다 보복 타격을 가하는 방식이었다. 이 논리에 따라 최초의 공중 작전인 '플레밍 다트 1(Flaming Dart I)'과 '플레밍 다트 2(Flaming Dart II)'가 각각 1965년 2월 7일 플레이쿠(Pleiku) 공격, 2월 10일 꾸이논(Qui Nhon) 공격에 대한 응징으로 수행되었다. 이어 1965년 3월 2일부터 대규모 폭격 작전 '롤링 썬더(Rolling Thunder)'가 시작되었다.
예상을 깬 북베트남 방공망
그러나 미국의 예상과 달리 북베트남은 동맹국들의 지원으로 전투기, 대공포, 레이더, 그리고 무엇보다 SA-2 지대공 유도미사일로 상당히 강화된 상태였다. 미국이 공중전을 개시했을 때 베트남은 이미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탄호아 교량 습격
롤링 썬더 초기 미군의 주요 목표는 탄호아(Tan Hoa) 교량이었다. 남북을 잇는 철도가 지나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미군은 이 교량의 파괴를 비교적 쉬운 임무로 여겼고, 1965년 4월 4일 F-105 전폭기들이 교량 파괴 임무를 띠고 출격했다. F-100 슈퍼 세이버 전투기들이 호위를 맡았다.
그러나 북베트남 방공망은 즉각 경계 태세에 들어갔고, 4대의 MiG-17이 요격에 나섰다. 완전히 기습당한 미군은 반응할 새도 없이 구형이지만 여전히 실전성 있는 소련제 전투기들에게 2기를 격추당했다. 이것은 앞으로 올 일들에 대한 경고에 불과했다. 곧 미군 정찰기들은 수십 개의 지대공 미사일 발사 진지를 확인했다.
삼중 방공 체계
1965년 7월 24일, 그중 하나가 사상 처음으로 지대공 미사일로 미 공군 팬텀 한 대를 격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미군은 곧 적이 방어를 세 개의 계층으로 조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방공의 중추는 지대공 미사일이었고, 발사 진지는 27mm부터 100mm까지 다양한 구경의 대공포로 이루어진 촘촘한 네트워크가 동시에 엄호하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북베트남의 대공포가 미군 항공기 격추의 대부분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방공의 세 번째 축은 소련제 전투기였다. 초기에는 MiG-17, 이후 MiG-19와 MiG-21이 투입되었다. 마지막 기종을 제외하면 앞의 두 기종은 같은 급의 미군 전투기와 성능 면에서 결코 대등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북베트남은 자신들의 항공력을 아껴 특정 요격 임무에만 사용하고, 주역은 미사일과 대공포에 맡겼다. 베트남 MiG들은 통상 최대 속도로 돌진해 미군 공격기의 후방에 붙어 열추적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기관총을 난사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도그파이트를 벌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공중전 자체는 물론 있었지만 일반적인 교전 방식은 아니었다. 한편 미군이 적 미사일 진지를 집요하게 공격하자 베트남은 가짜 미사일 진지를 만들고 다수의 대공포로 엄호하는 기만 전술도 동원했다.
기술 대 끈기
미군 역시 기술적 우위를 총동원해 적 레이더와 미사일에 대응하는 전자전기와 전자 교란(ECM)을 활용했다. 전자 교란 덕분에 미군은 1965년 10월 17일 적 미사일 진지에 대한 첫 성공적인 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미군의 전자 교란으로 적 레이더들이 눈먼 상태가 되자, A-4 스카이호크 편대와 해군 A-6 인트루더 편대가 하노이 북쪽의 미사일 진지를 파괴했다. 점차 미군은 적 미사일 진지 공격을 두 단계로 나누는 전술을 채택했다. 먼저 와일드 위즐(Wild Weasel) 전자전기가 적 레이더 전파를 탐지해 대레이더 미사일로 타격하고, 이후 전술 폭격기가 적 진지를 파괴하는 방식이었다. 베트남은 이에 대해 레이더를 끄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그렇게 하면 미사일의 효과마저 사라지는 딜레마에 빠졌다.
첫 격추 기록들
MiG 최초 격추는 1965년 6월 17일 기록되었다. 항공모함 USS 미드웨이 소속 팬텀 2기가 4대의 MiG-17을 발견했고, 미군 조종사 페이지(Page)와 배트슨(Batson)이 스패로우 유도미사일로 적기 한 대를 격추했다.
가장 기이한 공중전은 A-1 스카이레이더 공격기 2기와 MiG-17 2기 사이에서 벌어졌다. 느린 속도를 오히려 역이용한 미군기는 연속적인 근접 기동 끝에 적기 한 대를 격추하는 데 성공했다. 미 공군의 첫 격추는 1965년 7월 10일이었다. 이번에도 F-4 팬텀이 사이드와인더 미사일로 적기 2대를 격추했다.
'볼로' 함정 작전
미군은 적기를 유인해 최대한 많이 파괴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제8전투비행단에 맡겨진 '볼로(Bolo)' 작전이었다. 평소처럼 F-4 팬텀의 호위를 받는 일반 전투기들을 적 목표물에 보내는 대신, 오직 팬텀만을 출격시켰다.
레이더 화면에 포착된 기체들을 미군 폭격기로 착각한 베트남군은 요격기들을 발진시켰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 앞에 선 것이 적의 최강 전투기임을 알고 놀랐다.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졌고 베트남은 7기를 잃었다.
인프라 공격과 실패
롤링 썬더 작전은 여러 형태로 계속 이어졌다. 미군은 실질적인 결과를 얻으려면 보복 전술을 버리고 적 인프라에 대한 본격적인 전술 타격, 필요하다면 제한적 규모의 전략적 '준전략적' 폭격에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논리에 따라 미군은 항구, 창고, 정유시설, 교량, 도로, 그리고 B-52의 단골 목표였던 호치민 루트 등 적 인프라에 대한 공중 캠페인을 시작했다. 동시에 강과 하천에는 공중 기뢰가 살포되고 적 공군기지에 대한 습격이 이어졌으며, 북부의 산업 인프라에 대한 공습도 뒤따랐다.
그러나 롤링 썬더 작전은 결국 실패했다. 실패의 이유는 단순하다. 첫째, 미군은 늘 그렇듯 북베트남 방공망을 과소평가했다. 둘째 이유는 더욱 단순했다. 폭격은 산업 인프라와 기술 인프라, 나아가 광범위한 생산 기반을 파괴해 전쟁 수행 수단을 빼앗음으로써 교전 국가를 마비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경우 이 교리는 적용될 수 없었다. 나라의 산업 기반이 초보적인 수준이라 그 파괴가 전쟁 지속 능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고, 모든 무기와 물자는 중국과 소련이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항구와 항만 시설의 파괴도 북베트남에게 부차적인 의미밖에 갖지 못했다.
교량과 도로는 미군 폭격 직후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 수리반에 의해 때로는 몇 시간 만에 복구되었다. 게다가 베트남은 점차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밤에 페리로 강을 건너고, 공중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험난한 오솔길을 따라 자전거나 어깨로 물자를 운반한 것이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첨단 기술은 문자 그대로 베트남 병사들의 가녀린 어깨 앞에서 굴욕을 당했다.
호치민 회랑도 마찬가지였다. 라오스를 관통하는 이 회랑은 종전 내내 남베트남 베트콩 게릴라의 주요 보급로였다. 미군은 이에 맞서 괴물 같은 B-52를 동원했고, 매번 폭격이 지형 자체를 바꾸어 놓았지만 회랑의 교통은 끊긴 적이 없었다.
미국은 독일식 공중 캠페인을 기대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조차 미국의 전략 폭격은 고도로 산업화된 독일의 산업 인프라를 파괴하지도, 독일인들의 전쟁 지속 의지를 꺾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