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장 질 장군: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 공수부대를 지휘한 군인

장 질 장군: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 공수부대를 지휘한 군인

장 질(Jean Gilles, 1904년 10월 14일 페르피냥 출생 ~ 1961년 8월 10일 몽루이 별세)은 프랑스 육군의 장군으로, 특히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 공수부대를 지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56년 수에즈 위기 당시 포트사이드 지역의 공수 작전을 총지휘하기도 했다.

가족 배경

장 질(본명: Jean, Marcellin, Joseph, Calixte)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9월 전사한 조제프 마리우스 질 대위와 마리 파제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 자란 그는 1933년 쉬잔 티볼과 결혼하여 피에르, 미셸, 루이, 앙리 네 아들을 두었다.
아들 중 미셸은 'Terre d'Afrique'(1957~1959) 부대에서 복무하다 1961년 2월 2일 알제리에서 전사했으며, 아셰트(Hachette) 출판사에 근무하던 루이는 1967년 9월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막내 앙리는 툴루즈 소시에트 제네랄 지역 지부장으로 은퇴했다.

군 경력

장 질은 12세부터 라플레슈 군사 학교(프리타네 국립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22년 18세의 나이로 생시르(Saint-Cyr)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격 훈련 중 입은 중상으로 한쪽 눈을 잃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졸업 후 그는 제24 세네갈 저격연대에 배속되어 모로코로 건너가 리프 전쟁에 참전했고, 이때 첫 무공 표창과 함께 스페인의 알폰소 13세 메달을 받았다. 이후 낙타 기병 장교(메하리스트)로 복무하며 사막의 모래언덕을 누비다가, 1938년 대위 계급으로 모로코를 떠났다.

제2차 세계대전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제7 식민지 보병사단(DIC)에 배속된 그는 1940년 말 니제르의 빌마로 파견되었다.
1942년 프랑스에서 동원 해제된 후 북아프리카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스페인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이후 의료적 사유로 석방된 그는 제9 식민지 보병사단에 입대하여 제13 세네갈 저격연대 제2대대의 지휘를 맡았다.
1944년 6월 엘바섬 탈환 작전에 참여한 그는 프로방스 상륙 이후 드라트르(de Lattre) 장군의 제1군 소속으로 프랑스 영토 수복 전역과 1945년 독일 진격 전역에 참전했다.

인도차이나 전쟁

제23 식민지 보병연대(구 제13 세네갈 저격연대의 새 이름) 부연대장으로서 1945년 10월 중령 계급으로 인도차이나에 도착했다. 1946년에는 르클레르(Leclerc) 장군의 참모부로 발령받았고, 같은 해 3월 6일 하이퐁 상륙 작전 이후 특진으로 대령에 임명되었다.
1947년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독일 주둔 식민지 대전차연대 연대장을 거쳐, 전쟁대학 과정을 마친 후 제1 식민지 공수 코만도 반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 사이인 1949년에는 낙하산 강하 자격증을 취득했다.
1951년 다시 인도차이나로 돌아간 장 질은 나산(Na San) 전투(1952년 9월~12월)에서 큰 활약을 펼쳤으며,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 분지 점령 작전인 '카스토르 작전(Operation Castor)'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나산 전투 한가운데 있던 1952년 12월 23일 준장 성별을 받았고, 1953년에는 인도차이나 주둔 공수부대(TAPI)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알제리 전쟁과 수에즈 위기

1954년 3월 프랑스 본토로 귀환한 그는 공수부대와 제25 공수보병사단(DIAP)의 지휘권을 맡았다.
1956년 말 수에즈 운하 위기가 발발하자 포트사이드 지역 공수 작전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958년에는 콩스탕틴 군단 사령관으로 부임해 알제리 전선을 지휘했다.

알제리 이후와 말년

알제리에서 귀환한 후 장 질은 툴루즈의 제5 군관구 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1961년 2월 알제리에서 아들 미셸이 전사한 지 불과 몇 달 후인 같은 해 8월 10일,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70년 생시르 특수군사학교의 한 기수가 '장 질'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1962년에는 아들 미셸 질 소위와 함께 라플레슈 국립군사학교 코르니슈 브루토안(Corniche brutionne)의 대부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현재 피레네오리앙탈주 몽루이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