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다르다넬스 캠페인(1915): 갈리폴리 상륙작전과 식민지 부대의 희생

카르스(Kars) 전선에서 고전하던 러시아가 동맹국들에게 양동 작전을 요청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의 전체 구도를 바꿀 수 있는 중대한 군사 행동을 구상하게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열면 터키를 제압하고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보급선을 회복할 수 있으며, 아직 입장을 망설이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있는 발칸 지역에서 연합국의 절대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1915년 3월 18일에 감행된 첫 번째 다르다넬스 해협 강행 돌파 시도는 여러 전함을 잃는 참패로 끝났다.

다르다넬스 캠페인(1915): 갈리폴리 상륙작전과 식민지 부대의 희생
다르다넬스 캠페인

원정군 편성과 쿰 살레 양동 작전

해상 돌파의 실패 이후 연합군은 원정군 파견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해밀턴(Hamilton) 장군의 지휘 아래 영국 4개 사단과 프랑스 다마드(d'Amade) 장군의 부대가 집결했으며, 프랑스군에는 제2혼성식민지여단(제4 및 제6 혼성식민지보병연대, 각각 백인 1개 대대와 흑인 2개 대대로 편성)이 포함되었다.

이집트에 집결한 부대는 4월 25일 두 방면으로 나뉘어 진격했다. 하나는 유럽 쪽 해안의 세드울바르(Seddülbahir), 다른 하나는 아시아 쪽 해안의 쿰 살레(Kum Kale)였다. 후자의 양동 작전은 식민지여단장 뤼프(Ruef) 대령에게 맡겨졌고, 제6 혼성식민지보병연대와 75mm 포 1개 포대, 공병 부대 등이 배속되었다.

세네갈 병사들은 터키군의 코앞에서 기막힌 기습을 성공적으로 감행했다. 쿰 살레에서 출발한 그들은 격렬한 역습을 여러 차례 격퇴하며 오르하니에(Orhanié)까지 돌진했고, 오후에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 작전에서 연합군은 병사 750명과 장교 20명을 잃었지만, 적측은 전사·부상·포로 합계 1,730명의 손실을 인정했다. 해밀턴 장군이 "경탄할 만큼 완벽하게 수행된 작전"이라 평한 이 양동은 상당수의 터키 사단을 아시아 쪽 해안에 묶어두는 효과를 거두어, 이들이 유럽 쪽 해안에 도달한 것은 4월 29일 이후였다.

다르다넬스 캠페인(1915): 갈리폴리 상륙작전과 식민지 부대의 희생
다르다넬스 캠페인

상륙과 크리티아 전투

한편 영국군 주력은 프랑스 부대와 함께 테케 곶(Cape Tekké)과 세드울바르 사이, 모르토 만(Morto Bay) 동쪽에 상륙했다. 그러나 4월 27일부터 29일까지의 전진은 고작 4~5km에 그쳤다. 북쪽은 영국군, 남쪽은 프랑스 본토 여단에 의해 방어선이 이어진 가운데 식민지여단은 모르토 만에 의지해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5월 1일부터 4일까지 터키군의 맹렬한 공격에 시달렸다. 다행히 제4혼성식민지여단(제7 및 제8 혼성식민지보병연대)을 포함한 새로운 프랑스 사단 등 증원부대의 도착으로 전선은 간신히 안정되었다.

갓 상륙한 이 부대들은 5월 6일과 7일의 공세에 투입되었다. 목표는 케레베스 데레(Kerevés Déré) 서부 고지와 크리티아(Krithia) 남쪽 1,800m 지점의 능선 돌출부로, 크리티아는 영국군의 목표 지점이자 갈리폴리 반도 전체의 관문이었다. 전투는 극히 치열했지만 전진은 고작 1km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 성과는 의미가 있었다. 비록 좁기는 하나 후방 거점 지역이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이다.

구로 장군의 진지 재편과 공세

5월 14일 프랑스 원정군 지휘권을 인수한 구로(Gouraud) 장군은 후방 지역 확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렘노스(Lemnos) 섬에 저장고와 중간 보급기지를 설치해, 각 대대마다 300명의 병력을 화망 밖에서 충분한 체력을 유지하며 대기시켜 전황에 따라 신속히 증원 투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한 샹파뉴의 황량하고 메마른 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진지를 조직적으로 재편했고, 6월 1일 해밀턴 장군이 공세 재개를 결심하면서 상황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이후 일련의 전투가 시차를 두고 벌어져 거의 모든 연합군 포병이 교대로 돌격 부대를 지원할 수 있었다. 6월 30일에는 식민지 부대가 제2사단이 터키군의 중요 거점인 '사각형 요새(quadrilatère)'를 함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승리는 구로 장군의 중상이라는 비보에 가려졌고, 그는 바유(Bailloud)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이후 수주 동안 엄청난 희생을 수반하는 공격과 역공이 번갈아 이어졌지만 뚜렷한 결과는 없었다.

철수와 희생의 대가

결국 갈리폴리 반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한 연합국은 동방의 새로운 작전 지역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1915년 9월 말 불가리아가 연합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연합국은 테살로니키(Salonika)를 거점으로 하는 발칸 신전선을 열게 되었다.

반도의 철수는 12월까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몇 달간 보람 없는 전투 속에서 연합군, 특히 식민지 부대와 세네갈 병사들이 발휘한 정신적 우위로 인해 터키군은 어느 정도 소극적으로 움직였고, 이것이 철수를 용이하게 했다. 프랑스는 다르다넬스에 총 79,000명을 파병했으며, 그중 27,000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이러한 희생 가운데 식민지 부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3분의 2에 달했다. 브룰라르(Brulard) 장군의 지휘 아래 제17식민지사단으로 통합된 이들은 이 진지를 마지막으로 떠난 부대가 되었다. 거의 1년 동안 이곳에서 상당 규모의 터키군이 묶여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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