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베르됭 전투의 상징, 두오몽 요새 — 함락과 탈환의 역사

두오몽 요새(Fort de Douaumont)는 프랑스 북동부 뫼즈(Meuse) 지방에 자리한 군사 요새다. 베르됭에서 북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지점, 뫼즈 강 우안의 능선을 이루는 언덕 위에 세워졌으며, 19세기 말 프랑스 동부 국경 도시들을 방어할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요새는 있었지만 무기는 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곳에 냉혹한 아이러니를 남겼다. 1915년, 프랑스군 지도부는 이 시기에 건설된 요새들이 현대전의 화력 앞에서 방어 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두오몽 요새의 주포는 철거되었고, 수비 병력도 보급 임무를 맡는 소수 인원으로 축소되었다. 이는 훗날 베르됭 전투의 비극을 결정짓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916년 2월 25일, 단 하루 만의 함락

1916년 2월 25일, 독일군은 탈롱(Talon), 루브몽(Louvemont), 아르도몽(Hardaumont), 코트 뒤 푸아브르(Côte du Poivre) 고지를 차례로 넘어 두오몽 요새에 진입했고, 사실상 큰 저항 없이 요새를 점령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후 전선은 요새 외곽에서 교착되었고, 그 주변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5월 22일에는 프랑스군 제5사단 소속 병력 일부가 하루 만에 요새 해자까지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요새를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고, 24일 독일군에 의해 다시 밀려났다.

망갱 장군의 대공세와 요새 탈환

이 전략적 요충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대규모 공세가 불가피했다. 1916년 10월 24일, 샤를 망갱(Charles Mangin)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마침내 공세에 나섰다. 프랑스군은 요새에 도달해 주변 고지의 독일군을 몰아냈고, 6,000명이 넘는 포로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며 두오몽 요새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30만 전사자를 기리는 오세리움

이처럼 격렬했던 전투를 기리기 위해 1932년, 요새 아래에는 두오몽 오세리움(Ossuaire de Douaumont), 즉 유골 안치소가 세워졌다. 이곳에는 베르됭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약 30만 명의 전사자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오늘날까지 전쟁의 참화를 상징하는 추모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

RICM 연대의 활약

레니에(Régnier) 중령이 지휘하는 모로코 식민지 보병연대(RICM)는 1916년 6월 8일, 함락 위기에 놓인 보 요새(Fort de Vaux)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 돌격을 감행했다. 연대는 요새 해자까지 진입해 끊임없는 포격과 독일군의 역습 속에서도 진지를 사수했지만, 장교 25명과 병사 1,120명이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6월 15일 전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RICM은 8월 초 전선에 복귀하여 8월 18일 플뢰리드방두오몽(Fleury-devant-Douaumont) 마을을 훌륭하게 탈환하며 임무를 완수했다. 두 달 뒤, 이 연대는 오디옹(Haudiomont) 채석장, 두오몽·보 요새, 담루(Damloup) 포대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은 망갱 전투단에 배속되었다. 제43 세네갈 대대 2개 중대, 소말리 대대 2개 중대, 인도차이나 저격병 제6대대 1개 중대의 증원을 받은 RICM은 10월 24일, 완벽에 가까운 기동으로 두오몽 요새를 탈환하는 영광을 안았다.

12월 15일 또 한 번의 공세에서도 망갱 장군의 지휘 아래 루브몽(Louvemont)을 점령하며 연대의 전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더했다. 베르됭 전장에서 벌어진 네 차례의 혹독하고도 영광스러운 전투에서 RICM은 평시 정원을 훌쩍 넘는 사상자를 냈지만, 약 2,000명의 포로와 다량의 장비를 확보했고, 부여된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 당시 스스로 불패라고 믿던 적을 상대로 거둔 이 승리는 전쟁 기간 중 가장 고무적인 성과 중 하나로 평가된다.

오늘날 두오몽 요새는 베르됭 전장의 생생한 증거로서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과 프랑스군의 저항 정신을 동시에 보여주는 역사 현장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