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루이드는 영국 제도와 갈리아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 퍼져 살던 켈트 문화권의 종교 지도자로, 판사·의사·상담가의 역할까지 겸한 일종의 사제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드루이드도 문자 기록을 남기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의 신앙이 이를 금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우리가 드루이드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인과 로마인 같은 동시대 기록자들을 통해서뿐입니다.

그렇다 보니 드루이드 개개인의 이름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으며, 남아 있는 몇몇 사례 역시 현실보다는 신화나 민간전승과 얽혀 있습니다. 울스터의 왕 콘코바르 막 네사(Conchobar mac Nessa) 궁정의 최고 드루이드였던 카스바드(Cathbad)가 그렇고, 신화 순환(Mythological Cycle)에서 투아하 데 다난(Tuatha De Danann)으로부터 아일랜드를 침공해 정복한 밀레시안(Milesians)의 드루이드 아메르긴 글루잉겔(Amergin Glúingel)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드 막 누아트(Tadg mac Nuadat)나 머그 루이스(Mug Ruith) 같은 신화적 전통의 드루이드들은 반드루이(bandrúi), 즉 아일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에 등장하는 보드말(Bodhmall), 틀랙트가(Tlachtga), 비로그(Biróg) 같은 여성 드루이드들과 함께 전설의 세계를 공유합니다.

드루이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300년경 집필된 두 편의 그리스 문헌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는 알렉산드리아의 소티온(Sotion of Alexandria)이 쓴 철학사이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마술에 관한 작품입니다. 두 원본은 모두 전해지지 않지만, 서기 3세기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가 지은 저명한 철학자들의 생애, 견해 및 발언에 폭넓게 인용되어 그 내용이 전해집니다.
드루이드를 다룬 최초의 완전한 저작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0~40년경 집필한 갈리아 전쟁기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카이사르의 기록이 부정확하고 과장되었으며, 드루이드에게 원래 있을 수 없는 기능까지 부여했다고 비판합니다. 반면 이를 믿을 만한 자료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름과 존재가 문헌으로 입증된 유일한 드루이드가 등장합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기원전 44년 첫 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마지막 독재 시기에 집필한 점술에 관하여(De divinatione)에 언급된 인물입니다. 키케로는 아이두이(Aedui) 부족 출신의 갈리아 드루이드 디비키아쿠스(Diviciacus)를 직접 만났다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디비키아쿠스가 과연 드루이드였느냐는 점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저작에서 그를 여러 차례 거론하지만, 한 번도 드루이드라고 칭하지 않고 오직 군사·정치 지도자로만 묘사합니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키케로는 그가 드루이드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키케로의 말을 믿는다면, 디비키아쿠스는 역사상 유일하게 문서로 입증되고 이름까지 확실히 알려진 드루이드가 되는 셈입니다. (델라마르 갈리아어 사전에 따르면 '디비키아코(Diviciaco)'라는 이름은 복수자를 뜻합니다.)

키케로와 디비키아쿠스의 만남은 기원전 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르베르니와 동맹을 맺은 수에비족의 왕 아리오비스투스(Ariovistus)에 맞서 카이사르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디비키아쿠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있던 키케로의 호화로운 별장에 손님으로 머물렀습니다. 두 사람은 갈리아 와인 무역이라는 공통 관심사 덕분에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키케로는 디비키아쿠스가 자신의 동생 퀸투스의 친구이기도 했다고 암시하기도 합니다.
로마는 이미 기원전 121년부터 아이두이족을 지원해 왔습니다. 디비키아쿠스는 이번 방문에서 동맹 갱신을 요청했습니다. 아이두이족은 스스로를 로마인의 형제로 여겼고, 실제로 로마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귀족 가문을 하나로 모으는 원로원에 기반한 매우 유사한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단, 한 가문당 한 명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을 재개할 때 내세운 명분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디비키아쿠스에게는 반(反)로마 성향의 동생 두므노릭스(Dumnorix)가 있었는데, 그는 갈리아 원정 내내 카이사르의 주요 골칫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두므노릭스는 체포되었고, 카이사르가 디비키아쿠스에게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주하다 목숨을 잃게 됩니다.
디비키아쿠스 본인의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기원전 44년 키케로가 점술에 관하여를 집필할 당시에는 이미 과거의 인물로 회고되고 있습니다. 기원전 61년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는 약 34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그는 아마도 정치·군사적 권력을 부여받는 연례 선출직인 베르고브레토(vergobret, 아이두이족의 최고 행정관)였을 것입니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디비키아쿠스는 당시 로마의 최고 사제(pontifex maximus)였던 카이사르처럼, 베르고브레토의 정치적 권력과 드루이드의 종교적 권력을 한 몸에 결합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드루이드교 연구자 제인 웹스터(Jane Webster)는 "드루이드는 고고학적으로 확인될 가능성이 낮다", "데이터가 빈약해 추측이 난무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현재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이름은 단 하나뿐입니다.
오튌(Autun)시는 1884년 10월 14일, 아르투르 드 그라비용(Arthur de Gravillon)의 작품인 디비키아쿠스 동상을 건립했습니다. 게르만 부족에 맞서 카이사르와 손잡았던 탓에 독일인들의 눈 밖에 났던 이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점령기에 해체되어 녹아 없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