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손타이 전투(1883): 쿠르베 제독과 프랑스군의 통킹 원정

손타이 전투(1883): 쿠르베 제독과 프랑스군의 통킹 원정
손타이(Son-Tay)

리비에르 대위의 복수를 명받은 쿠르베 제독

1883년, 리비에르(Rivière) 대위와 그의 부대가 학살당했다는 소식은 프랑스 전역에 큰 충격을 안겼다. 여론의 거센 압박을 받던 쥘 페리(Jules Ferry) 정부는 보복 작전을 결정했다. 1883년 6월 1일, 정부는 뉴칼레도니아 총독으로 재임하며 극한의 난관을 성공적으로 헤쳐 온 경력을 인정받은 쿠르베(Courbet) 해군 소장에게 통킹 연안 해군 사단의 지휘권을 맡겼다. 이 함대는 소형 전함 2척, 포함 및 경순양함 7척, 어뢰 운반선 2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후에(Hué) 상륙 작전과 휴전 협정

7월 30일 쿠르베는 하이퐁에 도착했고, 8월 16일에는 안남(Annam) 연안의 봉쇄를 선포했다. 이어 8월 18일 투란(현 다낭)을 출발해 후에 연안에 닻을 내렸다. 8월 20일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파라용(Parayon) 사령관이 선두에 서고, 뒤이어 수병 300명과 해병대 2개 분대가 진격했다. 요새들의 집중 포화 속에서도 부대는 밀고 나갔다. 한 시간가량의 전투 끝에 부상자 몇 명만 발생하고 전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적군은 600구의 시신을 전장에 남긴 채 후퇴했다.

다음 날인 8월 21일, 쿠르베는 철수된 방어선 전체를 점령하고 후에에서 휴전 협정 체결을 강요했다. 불과 3주 만에 그는 리비에르 대위의 복수를 완수하며 부여된 임무를 달성한 것이다.

흑기군과 중국군, 손타이·박닌 요새 점거

그러나 승리 직후부터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문민 당국은 우유부단했고, 흑기군(Black Flags)은 재편성을 마친 뒤 중국 정규군과 합류하여 손타이(Son Tay)와 박닌(Bac Ninh)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요새를 장악했다. 증원군이 절실했지만 지원은 더디게 이루어졌고, 중국군은 공세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쿠르베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작전 계획을 세워 홍강(紅江) 기슭의 손타이를 공략 목표로 삼았다.

손타이 전투(1883): 쿠르베 제독과 프랑스군의 통킹 원정
손타이(Son-Tay)

손타이는 보방(Vauban)식 양식으로 축조된 성채로, 한때 앙리 리비에르와 그의 동료들을 학살했던 흑기군 지도자 룬 빈 푹(Lun Vinh Phuoc)이 지휘하는 2,000명의 수비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수비군은 현대적인 소총으로 무장했으며, 성채에는 150문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바벨의 군대', 이질적 부대의 통합

그렇다면 쿠르베는 무엇으로 이를 맞설 수 있었을까? 그의 부대는 알제 출신 튀르코(Turcos) 보병, 코친차이나 산병, 외인부대 일부 병력으로 구성된 지나치게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여기에 기마포 5개 포대와 해병대 65mm 포 2개 포대가 지원했지만, 총 전력은 겨우 5,00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언어까지 제각각이어서 부대를 하나로 묶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문자 그대로 '바벨의 군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독의 위상, 그가 부하들에게 요구한 엄격한 규율 — 덕분에 그는 언제나 병사들에게 깊은 신뢰와 애정을 받았다 — 그리고 혹독한 훈련은 이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푸사(Phu-Sa) 돌파전

손타이는 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제방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두 개의 제방은 푸사에서 교차했다. 쿠르베의 첫 번째 공격은 바로 이 지점에 집중되었다. 12월 11일, 프랑스군은 두 개의 종대로 나뉘어 푸사를 향해 진격했다. 주력 종대는 제독 친히 지휘하며 수로를 따라 이동했고, 벨린(Belin) 대령이 이끄는 제2종대는 육로를 선택했다.

오후 3시, 제1종대는 다이(Day) 강 합류점에서 500미터 상류 지점에 상륙했고, 저녁 무렵 제방에 도달해 진지를 구축했다. 지형 장애물로 늦어진 제2종대는 12월 13일 정오에야 합류했다. 12월 14일, 쿠르베는 푸사를 강습하여 마침내 함락시켰다. 흑기군은 거듭된 역공에도 불구하고 빼앗긴 진지를 되찾지 못했다.

손타이 전투(1883): 쿠르베 제독과 프랑스군의 통킹 원정
손타이(Son-Tay)

손타이 성채의 최종 함락

첫 승리에 힘입은 쿠르베는 이제 손타이 자체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는 네 명의 부관 — 비쇼(Bichot), 벨린(Belin), 바덴(Badens), 르빌롱(Revillon) 대령 — 과 함께 서문에 진지를 구축했고, 포병대는 수비군의 배후를 집중 포격했다. 몇 시간의 포격 끝에 저녁 5시, 제독은 외인부대를 선봉으로 최종 돌격을 명령했다.

저녁 6시, 쿠르베는 성내 광장에 진입하여 전투를 종결지었다. 룬 빈 푹은 이 패배로 영원히 권위를 잃고 생존 병력과 함께 후퇴했으며, 전장에는 3,000명의 전사자를 남겼다. 프랑스군의 손실은 전사 80명, 부상 30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