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색이 짙어진 전장에 던져진 마지막 식민지 부대
1940년 6월 15일, 식민지군의 마지막 정규 편제 부대들이 이미 패배가 확정된 전투에 투입되었다. 더구나 이들은 분산된 소부대 형태로 운용되었다. 몽텔리마르(Montélimar)를 떠난 제8식민지보병사단(8e D.I.C.)은 소속 연대 중 하나인 제25세네갈척후연대(25e R.T.S.)를 리옹 교외에 남겨둔 채 론 강 유역 출구 방어전에 참여했던 것이다.
망트(Mantes) 인근에서 교전에 나선 이 부대는 우당(Houdan), 그리고 메텐논(Maintenon)을 거치며 치열한 지연 후퇴전을 벌였다.

- 세네갈인의 희생
“전쟁은 너희가 집에 돌아갔을 때 끝난다”
6월 24일, 라 에 데카르트(La Haye-Descartes) 인근, 샤텔로(Châtellerault) 앞에서 유명한 식민지보병연대(R.I.C.M.)는 크뢰즈(Creuse) 강 도하를 시도하던 적 부대에 역습을 감행했다. 독일군은 밀려나 장비와 수많은 포로를 내버렸다. 충격과 분노에 사로잡힌 포로들은 물었다.
“무슨 짓이야? 전쟁은 끝났어! 총 쏘지 마!”
그러자 이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전쟁은 너희가 집에 돌아갔을 때 끝난다!”
몇 시간 뒤 R.I.C.M. 대원들은 휴전이 실제로 체결되었음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대답은 부대의 좌우명처럼 자리 잡았고, 4년 뒤 그들은 이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물러서지 않고 버텨라” — 단호한 명령
리옹 주변에 남은 부리앙(Bouriand) 대령의 제25세네갈척후연대는 두 개 요소로 분할되었다. 한 개 대대는 론 강 좌안에 남아 도시의 즉각 방어를 맡았고, 나머지 두 개 대대는 서쪽으로 이동해 생테티엔(Saint-Étienne)과 리옹 사이, 생제르맹오몽도르–샤슬레(Saint-Germain-au-Mont-d'Or–Chasselay) 방어선에 배치되었다.
임무는 몇 마디로 요약되었다. “물러서지 않고 버텨라.” 세네갈인들에게 이것은 명확하고 단순한 명령이었으며, 이를 어긴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제25척후연대가 마주한 방향은 북쪽, 즉 제16군단(XVI. Armeekorps) 소속 제4기갑사단(IV. Panzerdivision)이 쇄도해 오는 길목이었다. 독일군은 이제 이 전역을 단순한 군사 행진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휴전은 작전 마지막 주의 지평선에 있었다. 6월 18일, 그들은 론 강 우안을 따라 리옹을 돌파할 준비를 마쳤다. 19일에는 앙스(Anse)를 통과한 뒤 리브드지에(Rive-de-Gier)를 경유해 주공세 축선으로 되돌아오는 선회 기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몽륄종(Montluzon)의 저지 거점 앞에서 뜻밖의 걸림돌과 마주친 것이다.

- 세네갈인의 희생
수도원 요새, 600명의 결사 항전
전날 밤, 제25척후연대는 “끝까지 버틸 것”을 지시했던 이전 명령의 취소 통보를 받았다. 병력 일부는 리브드지에로 후퇴했지만, 통보를 받지 못한 한 개 대대, 600명이 현지에 남았다. 이들은 성요셉회(Sœurs de Saint-Joseph) 수도원을 진정한 요새로 만들어, 그곳이 봉쇄하는 모든 축선의 출구를 지배하는 요충지에 자리 잡았다.
독일군에게는 전차와 야포, 기관총이 있었다. 반면 세네갈인들에게는 1차 대전을 견뎌낸 구식 “86/93” 소총이 전부였다. 분대당 기관단총 한 자루, 중화기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세네갈인들은 장갑에 맞서 의지와 총검으로 응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공격은 새벽 이른 시간에 시작되었다.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지만, 수도원은 끝내 척후병들의 손에 남아 있었다.

- 세네갈인의 희생
하루 종일 이어진 백병전
적은 포격으로 저항 거점을 하나씩 파괴하려 했고, 이어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또다시 실패였다. 하루 종일, 세네갈인들은 차례로 몰려오는 공격 부대와 백병전을 벌였다. 이 작은 대대 하나를 꺾기 위해 적은 기갑여단 하나와 기갑공병연대(Panzerpionier) 두 개라는 병력을 동원해야만 했다. 저녁 무렵, 거점들은 완전히 포위되어 차례로 함락되었다.
냉혹하게 계획된 학살
싸울 능력이 남은 유럽계 간부는 한 명도 없었고, 아프리카인 병사들을 위해 나서줄 이 또한 없었다. 그들은 먼저 수도원 담벼락 앞에 모여 세운 뒤 기관총으로 사살되었다. 일부는 공포에 미쳐 수도원 지하로 피신했으나, 그곳까지 쫓아가 기관총으로 쏘아 죽였다. 더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그들의 손은 철조망으로 결박되었다. 학살은 계속되었다. 끔찍하고, 무자비하게.
무장 해제된 척후병들 중 일부는 과수원 나무에 거꾸로 매달렸고, 또 어떤 이들은 길 위에 줄지어 눕혀진 채 전차 궤도에 깔려 으깨졌다. 겨우 스무 명 남짓만 살려두었다. 그들은 철사로 결박된 채 하룻밤을 선 채로 보냈다. 어쩌면 목숨을 건질 수 있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희망이었다.
새벽부터 공포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전투로 인한 격분이나 흥분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을 향한 결정은 이미 신중히 고려된 것이었고, 차갑게 집행될 예정이었다. 새벽녘 한 장교가 열세 명을 골라내 랑티이(Lentilly)로 데려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직접 파도록 명령받은 뒤, 전차의 기관총에 쓰러졌다.
여전히 짐승처럼 결박된 생존자들은 아무렇게나 리옹 교외 베즈(Vaise)로 몰렸다. 그곳 몽테 드 발몽(Montée de Balmont) 아래에서 삽과 총검으로 최후를 맞았다. 머리에 총탄 한 발을 받을 가치조차 없다고 여겨졌던 모양이다.

- 세네갈인의 희생
“여기서 한 개 군대를 막으려다 죽다”
어쩌면 독일군은 이 처형을 통해 본보기를 보이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며칠 동안 그들은 주민들이 이 영웅들의 처참한 유해를 매장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1년도 지나지 않은 1941년, 추모 명판이 세워졌다. “여기서, 전날 명령에 따라 한 개 군대를 막으려 한 스무 명의 세네갈 척후병이 독일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한 개 군대! 1940년 6월의 비극적인 나날에 프랑스인들에게 이름 없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죽음을 마땅히 받아들이는지 보여준 이 척후병들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찬사가 있겠는가?
다음 해, 독일군이 ‘자유지대’를 침공한 바로 그 날인 1942년 11월 8일, 학살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아프리카 전통 요새 ‘타타(tata)’를 재현한 기념비 앞에서였다. 그 주위로, 마침내 세네갈 척후병들은 모셔져 품위 있게 안장되었다. 그 숫자는 188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