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혁명정부와 테러: 자코뱅 독재의 흥망성쇠

지롱드당이 몰락하자 지방은 파리와 몽타뉴파(산악파)의 패권 강화에 항거하며 대규모 연방주의 봉기를 일으켰다. 카앙에 피신한 지롱드당 의원들의 영향을 받은 샤를로트 코르데의 마라 암살은 이 운동의 한 단면이었다. 내우외환이 격화되자, 1793년 4월 6일 뒤무리에의 배신 다음 날, 단톤이 주도하는 9인 공안위원회가 구성되며 본격적인 혁명정부가 수립되었다.

공안위원회의 성립과 테러 기구의 정비

공안위원회는 7월 개편 때 단톤이 배제되고 로베스피에르, 카르노, 생쥐스트, 쿠통, 빌로-바렌, 콜로 데르부아, 바레르, 린데, 프레리외르, 장 본 생탕드레 등으로 '2년(Year II) 대위원회'가 완성될 때까지 수차례 갱신되었다. 이들은 9월 9일(테르미도르 9일)까지 공화국 수호라는 단일 의지로 내정과 전황을 복구하는 압도적 업무를 수행했다.

이에 앞서 1792년 10월 2일 치안위원회가 창설되어 치안, 감옥 감시, 용의자 체포를 관장하며 테러의 토대를 마련했다. 외부 위기가 고조되자 단톤의 주도로 3월 10일 혁명재판소가 설치되었고, 푸키에르 탱빌이 검사로 임명되어 악명을 떨쳤다. 3월 21일 감시위원회가 제정되어 외국인 감시에서 용의자 감시로 확대되었고, 파견 대표들이 지방과 군대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민중 압력과 테러의 제도화

연방주의 반란, 방데 전쟁, 다국적 침공, 생필품 부족과 아시냐 인플레이션이라는 총체적 위기 속에서 자크 루 등의 앙라제(분노파)가 매점매석 금지법을 요구했다. 7월 공안위원회 개편 후 로베스피에르의 영향력이 커지자, 민중 압력에 밀려 8월 23일 총동원령, 9월 4~5일 민중 봉기 후 혁명군 창설, 곡물 최고가격제, 9월 29일 일반 최고가격제가 차례로 시행되었다. 9월 17일 용의자법 통과로 테러가 본격화되었고, 혁명재판소는 마리 앙투아네트, 마농 롤랑, 바스티유 총독 바이이, 오를레앙 공작, 뒤 바리 부인, 퀴스틴, 바르나브 등 약 2,600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리옹의 총살, 낭트의 익사형 등 지방 테러도 자행되었으나, 카리에르, 바라스, 프레롱 등의 과잉 진압은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제지되었다.

반기독교화와 최고존재 숭배

민중 운동의 또 다른 양상으로 반기독교화가 진행되어 11월 10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자유 축제가 열리고 23일 코뮌이 교회 폐쇄를 결정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반기독교화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12월 이를 제동 걸었다.

혁명정부의 선포와 전세 역전

공안위원회는 앙라제를 제거하고 10월 10일 "평화까지 혁명정부"를 선포했다. 12월 4일 혁명정부령으로 중앙집권이 강화되었고, 카르노, 린데, 프레리외르 등이 군대 재건을 주도했다. 과학자 동원, 전시 생산 체제, 초석 채굴, 파견 대표들의 군 지휘부 숙청과 보급 개선으로 가을부터 승전보가 잇따랐다. 리옹, 툴롱 탈환, 방데 진압, 됭케르크 해방, 옹스쿠트·모베주·란다우 전투 승리로 연말에는 침공이 격퇴되었다.

파벌 숙청과 대테러의 전개

1793년 말 산악파는 외국 음모 사건과 인도 회사 사건으로 부패가 드러나 분열했다. 공안위원회는 단톤파(온건파)와 에베르파(급진파) 양측을 차례로 숙청했다. 2월 21일 새로운 최고가격제, 방토즈 법령(용의자 재산 격리 및 빈곤 애국자 보상)으로 민심을 달래려 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3월 24일 에베르파, 4월 5일 단톤파가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파벌 제거 후 로베스피에르는 혁명군 해산(3월 27일), 독점 위원 폐지(4월 1일), 코뮌 정화, 민중 결사 해산으로 민중 운동을 통제하려 했으나 이는 지지 기반을 약화시켰다. 4월 16일 모든 피고인을 파리에서 재판토록 하고, 6월 10일(프레리알 22일) 법으로 피고인 권리를 박탈하고 '공화국의 적' 개념을 확대해 '대테러'가 시작되었다. 프레리알 22일부터 테르미도르 9일까지 1,376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최고존재 축제와 테르미도르 9일

루소의 영향을 받은 로베스피에르는 무신론에 맞서 6월 8일 최고존재 축제를 거행했으나 대중의 무관심과 동료들의 반감만 샀다. 승전으로 테러 정당성이 약해지는 가운데, 카르노의 질투, 바디에의 권력 투쟁, 마레(중도파) 협력으로 탈리앵, 바라스, 프레롱 등이 결집해 1794년 7월 27일(테르미도르 9일) 로베스피에르 일파를 무너뜨렸다. 다음 날 로베스피에르와 추종자들이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으며 테러는 종식되고 테르미도르 반동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