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알랭 푸르니에: 단 한 번의 만남이 낳은 불멸의 '그랑 모른느'

알랭 푸르니에: 단 한 번의 만남이 낳은 불멸의  그랑 모른느

유년 시절

앙리 알방 푸르니에(Henri Alban Fournier)는 1886년 10월 3일 프랑스 중부 솔로뉴 지방의 라샤펠당기용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세 살 아래인 여동생 이자벨이 있었으며, 훗날 그의 유일한 소설은 바로 이 여동생에게 헌정되었다.

교사였던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는 1898년까지 부모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서 공부했고, 이후 파리의 볼테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여행을 동경하던 그는 선원이 되기를 꿈꾸며 1901년 브레스트 해군사관학교 입시를 준비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바다보다 어린 시절을 보낸 솔로뉴의 드넓은 들판을 택한 것이다.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그것을 되찾고자 했던 앙리 푸르니에는 1905년 8월 13일 자크 리비에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향 마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18년 동안 방학을 보내온 라샤펠당기용은 나에게 꿈의 나라, 내가 추방당한 나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 시절의 조부모님 집을 지금도 생생히 그려볼 수 있다. 찬장에서 나는 냄새, 삐걱거리는 문 소리, 화분이 놓인 낮은 담장, 농부들의 목소리… 이토록 특별한 삶을 다 표현하려면 몇 페이지가 필요할 것이다."

이후 그는 부르주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2년 뒤 바칼로레아를 취득했다. 부모의 뒤를 이어 문학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에 전념했다. 라카날 고등학교에서는 평생의 친구이자 훗날 매부가 되는 자크 리비에르를 만나 오랜 서신 왕래를 이어갔는데, 두 사람은 예술에 대한 미적 감각과 진실 추구라는 공통점을 나누었다. 리비에르는 1909년 이자벨 푸르니에와 결혼했다.

이본 드 키에브쿠르와의 운명적 만남

1905년 6월 1일 승천일, 앙리 푸르니에는 평생의 큰 사랑이 될 여인을 만났다. 파리 그랑팔레 앞에서 '살롱 드 라 나시오날'을 관람한 뒤 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는 이본 드 키에브쿠르를 발견한 것이다. 우아하고 날씬한 금발의 여성, 바로 그가 꿈꾸던 소녀의 모습이 그의 마음 깊이 새겨졌다.

그는 그녀를 따라 배에 올랐고, 그녀의 집까지 찾아냈다. 며칠 동안 창문 아래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그는 마침내 6월 11일 용기를 내어 다가가 오랜 신비로운 대화를 나누었다. 짧은 만남과 단 한 번의 대화만이 기억으로 남았지만, 그는 더 이상 소식을 알 수 없는 이 여인을 향한 깊은 사랑을 품었고, 이후 필사적으로 그녀를 찾아 헤매게 된다.

"두 여인이 그의 곁을 지나갔고, 모른느는 가만히 서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훗날, 잊혀져 가는 아름다운 얼굴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려다 잠들 때면, 그는 꿈속에서 저 소녀를 닮은 여인들의 행렬을 보곤 했다. 한 사람은 저와 같은 모자를 썼고, 또 한 사람은 저와 같은 살짝 기운 눈매를, 또 다른 이는 저렇게 순수한 눈빛을 지녔다. 어떤 이는 저와 같은 잘록한 허리를, 또 어떤 이는 저와 같은 푸른 눈을 가졌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저 키 큰 소녀는 아니었다."

1년 뒤 승천일, 그는 다시 그랑팔레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라고 그날 저녁 자크 리비에르에게 적었다. "게다가 설령 왔다 해도,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본의 기억과 '그랑 모른느'의 탄생

1907년 앙리 푸르니에는 학업을 중단하고 2년간의 군 복무를 시작했다. 같은 해 그는 '알랭 푸르니에'라는 필명을 택해 잡지에 실리는 시와 에세, 단편에 이 이름으로 서명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문학 통신'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여기에 실린 시들은 사후에 시집 『기적(Miracles)』으로 엮이게 된다. 이 시들은 그가 『그랑 모른느』의 이야기를 구상하던 같은 시기에 쓰인 것들이었다.

소설의 집필은 1913년 1월에 완료되었고, 작품은 같은 해 7월부터 11월까지 '누벨르 르뷰 프랑세즈'에 5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여성들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랭 푸르니에는 이본 드 키에브쿠르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금발의 소녀를 찾는 여정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그녀는 『그랑 모른느』 여주인공의 모델이 되었으며, 그가 평생 좇는 꿈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8년간의 힘겨운 탐색 끝에 1913년, 그는 마침내 '아름다운 소녀'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하여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뒤였다. 절망 속에서 그는 8년간 자신을 괴롭힌 여인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을 잃은 지 7년이 넘었습니다. […] 그때 이후로 나는 당신을 찾기를 멈춘 적이 없습니다. […] 나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내 생애에서 당신을 본 짧은 시간을 분 단위로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 당신은 나에게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만 허락했습니다. 바로 문학적 영광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편지를 끝내 보내지 않았다.

마담 시몬과의 비밀 연애

1913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년 전, 알랭 푸르니에는 당대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 마담 시몬, 본명 폴린 르바르지의 연인이 되었다. 사라 베르나르트의 뒤를 이은 명배우였던 그녀는 푸르니에의 마지막 사랑이었고, 전쟁이 끝난 뒤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면 결혼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1914년 9월 22일, 조국을 위해 순교자처럼 생을 마감하게 된다. 같은 해 8월 20일자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수백 개의 잡지에 당신의 초상이 실렸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나는 그 페이지 조각 하나에도, 그 천사 같은 얼굴—미모가 견줄 것이 없고, 내가 키스하고, 안아보고, 두드리고, 흔들고, 어루만지고, 숭배하고, 소유했던 그 얼굴—조차 갖지 못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비밀로 유지된 채 1년간 지속되었고, 그동안 폴린은 임신했다. 그녀는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지키기 위해 1913년 낙태를 감행했다. 알랭 푸르니에와 폴린은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알랭 푸르니에의 최후

상등병으로 진급한 알랭 푸르니에는 곤쿠르상을 근소한 차이로 놓친 저명한 작가였음에도, 너그럽게 제안된 면역 혜택을 거부하고 1914년 8월 입대했다. 28세를 맞이하려던 참이던 그는 1914년 9월 22일, 베르덩 근교 생레미의 작은 숲에서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1991년 5월 집단 매장지에서 발견되어 1992년에야 신원이 확인되었다. 현재 그는 생레미라칼론 군사 묘지에 잠들어 있다.

자크 리비에르는 자신의 죽음 1년 전인 1924년, 훗날 시집 『기적』을 이루게 될 시들을 엮어냈다. 이자벨 리비에르 역시 같은 뜻에서 두 사람의 오랜 서신 왕래, 전선에서 보낸 오빠의 편지, 그리고 오빠에 대한 회상록을 출판하며 오빠와 남편의 기억을 보존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