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슐리펜 계획: 제1차 세계대전 독일의 승부수와 그 좌절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은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독일이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한 뒤 러시아로 전력을 돌려 양면 전쟁을 피하고자 수립한 독일군의 핵심 작전 계획이다. 이 계획은 1891년부터 1906년까지 독일 제국 참모총장을 지낸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Alfred von Schlieffen, 1833~1913)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1867~1869년 파리 주재 무관을 지내며 프랑스의 지리와 요새 체계를 면밀히 분석했다.

계획의 기본 구상: 우익의 대포위 기동

슐리펜은 프랑스-독일 국경의 강력한 요새선(알자스-로렌)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신 그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아르덴 숲을 통해 프랑스군의 좌익을 우회하는 대규모 우회 기동을 구상했다. 파리 동쪽을 선회하여 프랑스 주력군을 주라 산맥과 스위스 국경 방향으로 밀어붙여 섬멸한다는, 고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BC 216)에서 보여준 포위 섬멸전을 현대전에 적용한 대담한 발상이었다. 이 계획은 벨기에의 통행권을 얻거나, 거부 시 중립국 침공도 불사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전략적 전제와 가정

계획은 두 가지 핵심 전제 위에 서 있었다.

  • 러시아의 느린 동원: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와 미비한 철도망으로 인해 완전 동원에 6주 이상 소요되며, 국경 근처에 결정적 목표가 없어 깊숙이 진격해야 했다. 따라서 동프로이텐에 소병력(전체의 10%)으로 방어하며 시간을 번다.
  • 프랑스 정면 공략의 어려움: 알자스-로렌의 프랑스 요새선(에팔, 베르됭, 벨포르 등)은 정면 돌파 시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킬 것이 자명했다.

병력 배분과 6주간의 속도전

최종안은 전체 병력의 90%를 서부(프랑스)에, 10%를 동부(러시아)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서부군 주력(우익)은 벨기에 평야를 질주해 6주 내 파리를 점령하고 프랑스를 항복시킨 뒤, 전력을 동부로 돌려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속도전(Blitzkrieg)' 개념이었다. 슐리펜은 회고록에서 "메지에르-덩케르크 선을 통해 요새 프랑스로 진입해야 한다. 끊임없이 프랑스 좌익을 공격해 주라와 스위스로 몰아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병참적 이점: 피카르디 평야 vs 알자스-로렌

슐리펜은 병참 면에서도 우회로를 지지했다. 독일의 핵심 공업지대(하인 강 유역)와 프랑스 북부의 공업지대가 지리적으로 인접해, 벨기에 경유 시 점령지 자원을 즉각 활용하기 유리했다. 반면 알자스-로렌-아르덴-보주-주라 산맥을 넘는 정면 루트는 험준한 지형과 기후로 신속한 공격에 불리했다. 피카르디 평야를 통한 우회로는 측면 공격이 가능해 병참선 유지와 기동력 면에서 압도적 이점이 있었다.

몰트케의 수정(1911년)과 역사적 논쟁

1906년 슐리펜 은퇴 후 후임 헬무트 폰 몰트케(소몰트케)는 계획을 수정했다. 그는 원안의 우익 병력 비율(우익 7 : 좌익 1)을 공간과 병참 제약을 이유로 우익을 약화시키고 알자스-로렌 및 동부 전선 병력을 보강했다. 또한 네덜란드 침공을 배제하고 벨기에만 통과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를 두고 역사가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 L.C.F. 터너: 몰트케의 수정이 '주공 약화'와 '네덜란드 철도 미이용으로 인한 병목 현상'을 초래해 서부 전역을 시작부터 망쳤다고 비판.
  • A. 파머: 애초에 계획 자체가 러시아, 프랑스, 영국, 벨기에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결함품이었다고 반박.

하지만 일각에서는 계획의 설계 결함보다 현장 지휘부의 원칙 위배가 패인이었다고 본다.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알자스-로렌으로 깊숙이 진입하게 둬라. 그래야 우익이 후방을 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으나, 1914년 8월 바이에른 군단이 국경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역공까지 가하면서 포위망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실전의 벽: 리에주 요새와 벨기에의 저항

정치적으로 프랑스는 벨기에와 동맹을 맺지 않았지만 침공할 명분도 없었다. 반면 독일은 포위된 입장에서 벨기에 중립국 침공을 감수했다. 독일은 리에주, 나뮈르, 안트베르펜, 샤를루아의 4대 요새를 중포(1차 대전)나 공수부대(2차 대전)로 신속히 제압하려 했으나, 1914년 8월 4~6일 리에주 공략전에서 6개 여단(3만 9천)이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후퇴했다. 6만 포위군 투입 끝에 8월 16일 최후 요새가 함락될 때까지 수 일이 지체되었고, 이 '며칠'이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에게 재편성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두 번의 실행, 두 번의 다른 결말

  • 1914년: 우익의 위력 약화, 벨기에 저항 지연, 몰트케의 신경쇠약과 지휘 통제 실패, 프랑스군의 마른 강 반격으로 계획 좌절. 참호전과 양면 전쟁의 수렁으로 빠짐.
  • 1940년: 만슈타인 계획(낫질 작)으로 아르덴을 돌파, 덩케르크까지 북상하며 슐리펜이 꿈꾼 '대포위'를 사실상 구현. 프랑스 항복.

슐리펜 계획은 '완벽한 계획은 실행되지 않고, 실행된 계획은 완벽하지 않다'는 전쟁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것은 독일 군사 사상의 정수이자, 병참·정치·심리적 변수를 배제한 기하학적 낙관론의 한계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