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됭 전투: 프랑스 사령부의 대응
1916년 2월 25일, 조프르(Joffre) 장군은 전략 예비대로 편성되어 있던 제2군을 베르됭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제2군은 1915년 6월 21일부터 페탱(Pétain) 장군이 지휘해 왔으며, 조프르는 그에게 베르됭 지역의 총지휘권을 맡겼습니다.
임명 소식을 전하러 간 부관은 호텔에서 애인과 함께 있는 페탱을 발견했다고 전해집니다. 페탱은 화력을 중시하도록 훈련된 보병 장교였습니다. 그는 늘 "화력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반복해 강조했죠. 그의 견해로는 보병의 진격은 반드시 포병의 지원 아래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실제로 전년도에 그의 전술 타당성은 이미 입증된 바 있었습니다. 그는 병사들의 체력과 노력을 아끼는 지휘관이었으며, 부대가 겪는 시련의 고통을 최대한 덜어주기 위해 세심히 신경 썼습니다.
방어 체계 재정비
페탱은 우선 방어선을 재편성했습니다. 방어 체계는 뮈즈(Meuse) 강 양안에 걸쳐 배치되었고, 증원된 포병은 최전선 부대를 엄호했습니다. 또한 요새들에 다시 무장이 갖춰졌습니다.
병력을 아끼기 위해 그는 이른바 '턴스타일(회전목마) 순환제'를 도입했습니다. 부대들이 교대로 베르됭을 방어하는 방식이었는데, 7월까지 프랑스 95개 사단 가운데 70개 사단이 이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스러운 길'과 보급 체계 확보
다음으로 그는 병참 체계를 정비했습니다. 유일한 보급로는 구불구불한 철도선과 그 옆을 따라 난 이차 도로뿐이었습니다. 이 도로는 폭이 불과 7미터에 불과해 비만 오면 진창으로 변했습니다. 그럼에도 56km에 달하는 이 구간 위로는 밤낮없이 트럭 행렬이 끊이지 않고 오갔습니다.
베르됭 전선의 생명줄인 이 길은 모리스 바레스(Maurice Barrès)에 의해 '라 부아 사크레(La Voie Sacrée)', 즉 '성스러운 길'이라 명명되었습니다. 3,000대가 넘는 트럭이 15초에 한 대 꼴로 이 도로를 통과했으며, 매주 9만 명의 병력과 5만 톤의 탄약이 수송되었습니다. 주변의 석회암 채석장이 열렸고, 현지 민간인들은 도로에 자갈을 계속 깔았습니다. 수천 톤의 잔돌이 전선을 오가는 트럭의 바퀴 아래 뿌려졌고, 두 줄로 나란히 굴러가는 트럭들은 마치 로드롤러처럼 돌을 다져 도로를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도로의 사용에는 극도로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습니다. 주차는 일체 금지되었고, 차량은 밤낮으로 범퍼를 맞대고 운행해야 했습니다. 교통 흐름은 어떤 경우에도 끊겨서는 안 되었으며, 고장 난 차량은 가차 없이 도랑으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포병 재편과 공중전의 시작
마지막으로 그는 포병을 재편성했습니다. 남은 중포병을 회수하여 페탱 장군 직속의 독립 포병 집단을 창설함으로써, 가장 위협받는 지점에 화력을 집중 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전선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습니다. 병사들은 페탱을 고통과 수고 속에서 그들을 지원해주는 진정한 지도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공군이 체계적으로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적 항공기를 하늘에서 몰아내고 적의 위치와 동향을 사령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은 첫 대규모 전투 비행부대가 창설된 것입니다. 페탱은 그들에게 "나는 눈이 멀었다. 하늘을 치우고 나를 밝혀주라"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독일군은 출발 지점에서 불과 4km 떨어진 지점에서 저지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투입한 막대한 자원에 비춰볼 때 전혀 성과라고 할 수 없는 미미한 진전에 불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