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즈 강 우안의 종말
1916년 2월 21일 월요일 오전 7시경, 베르됭 주교궁 안뜻에 380mm 포탄이 작렬했다. 독일군이 '게리히트(Gericht, 재판)'라 명명한 이 작전은 비인간적인 전투의 서막이었고, 그 전투는 무려 10개월간 이어졌다.
불과 몇 킬로미터 폭의 전선 위로 철과 불의 폭우가 쏟아졌다. 포격 소음은 150km 떨어진 보주(Vosges) 산맥까지 울려 퍼졌다고 전해진다. 단 이틀 동안 200만 발의 포탄, 즉 3초마다 중포탄 한 발씩이 프랑스군 진지에 떨어졌다.
강철의 비 아래, 부아 데 코르
같은 날 오후 4시, 6만 명의 독일군이 부아 데 코르(Bois des Caures) 일대 6km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독일 보병은 제한적인 진전을 이룬 직후 야포를 전개할 수 있도록 지형을 정비했고, 사거리가 늘어난 독일군 포병은 프랑스군의 후방과 전선을 잇는 연결망을 직접 위협했다. 프랑스군은 강철의 비에 짓눌렸다.
드리앙(Driant) 중령은 2월 22일 부아 데 코르 숲에서 전사했으며, 그와 함께 1,200명이 쓰러졌다. 생존자는 겨우 110명이었다. 나머지 지역의 방어선 역시 분쇄되고 와해되었다. 몇 시간 만에 숲은 사라지고 달 표면 같은 황량한 풍경으로 변했다. 오몽(Haumont), 에르브부아(Herbebois), 코르(Caures)의 숲들은 갈기갈기 찢기고 잘려 평평하게 깎였다. 밀려오는 포화 뒤로 라인 제7군단, 헤센 제18군단, 브란덴부르크 제3군단이 천천히 전진했다.
두오몽 요새의 함락
겨우 60여 명의 예비 병력(영토군)만이 지키던 두오몽(Fort Douaumont) 요새는 2월 25일 브란덴부르크 제24연대에 함락되었다. 이 성공은 독일 선전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었고, 프랑스에는 충격과 경악을 안겼다.
예상 밖의 저항
그럼에도 독일군의 진격은 크게 더뎌졌다. 포격 준비는 공격자에게도 불리한 면이 있었다. 갈아엎어진 지면은 부대의 기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고, 불안정하고 위험했다. 병력은 장애물을 피해 종대 행렬로 전진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예상을 깨고 독일군은 진격 도중 저항에 직면했다. 믿기 어렵게도, 소멸한 줄 알았던 프랑스군 진지에서 생존자들이 솟아났다. 장교 없이 소수의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무장하고 반격에 나섰다. 기관총 하나면 종대나 연대의 선두를 막기에 충분했다. 처참한 상태의 프랑스군 전사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거나 막아냈다.
첫 국면의 종결
형해만 남은 전선이 다시 조직되었다. 프랑스군 포 270문이 대등한 화력으로 응수하려 했고, 2월 24일에는 2개 사단이 신속히 증원 파견되어 남은 전선을 지켰다. 포격을 견뎌낸 생존자들과 함께 그들은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이로써 베르됭 전투의 첫 국면이 막을 내렸다. 팔켄하인(Falkenhayn)의 목표는 명백히 달성되지 못했다. 지나치게 좁은 전선, 통행이 어려운 지형, 그리고 프랑스 병사들의 투지가 독일군의 계획을 좌절시킨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