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베르됭 전투: 뫼즈 강 양안에서 벌어진 지옥의 공방전

뫼즈 강 양안으로 확전되는 전투

독일 황태자(크론프린츠)는 프랑스군의 포격을 잠재우기 위해 좌안 공격을 팔켄하인에게 간청했다. 이에 독일군은 좌안의 모르옴(Mort-Homme), 부르 숲(Bois des Bourrus), 쾨미에르 숲(Bois de Cumières), 코르보 숲(Bois des Corbeaux) 일대를 공격했고, 이어 우안에서는 보 본탄(Fort Vaux), 포아브르 능선(Côte du Poivre), 아보쿠르(Avocourt) 방면으로 진격했다. 어느 전선이든 양측 모두에게 끔찍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용기와 절망, 희생과 금욕을 한꺼번에 보여주었다.

이러한 진지들에서 프랑스군은 가차 없이 소모되고 피를 빨렸다. 수많은 부대가 몇 번이고 완전히 재편성되거나 아예 소멸해야 했다. 3월 6일, 독일군은 좌안의 모르옴을 맹포격한 뒤 공격에 나섰으나 프랑스군의 화망에 저지당했다. 이 '전투 속의 전투'는 3월 15일까지 계속되었고, 단 10일 만에 이 일대는 불모의 황무지로 변했다. 양측 병사들은 이곳에서 온갖 고통을 고스란히 겪었다.

같은 시기인 3월 7일, 독일군은 우안의 두오몽(Douaumont) 방면으로 공세를 개시했다. 두오몽의 폐허 속에서 서로를 학살하는 참상이 벌어졌는데, 이 요새는 무려 13회나 함락과 탈환을 거듭했다. 베르됭 돌출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살장으로 변했고, 어떤 연민보다도 야만성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철과 불, 그리고 진흙. 이 지옥 같은 삼위일체가 프랑스 '푸아유(poilu)' 병사들의 삶이자, 독일 '펠트그라우(feldgrau)' 병사들의 삶을 이루었다.

페탱과 조프르의 갈등

페탱은 조프르에게 증원을 요청했지만, 조프르는 솜 전선에서의 예정된 공세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에 페탱은 "최고사령부(GQG)가 나에게는 보슈(독일군)보다 더 큰 골칫거리다"라고 토로하기까지 했다.

3월 20일, 독일 바이에른 제11사단이 모르옴을 엄포하던 304고지를 공략했다. 그럼에도 뫼즈 강 양안에서의 독일군 총공세는 프랑스군에 의해 좌절되었다. 페탱은 "황태자 군대의 맹렬한 돌격은 어디서나 격퇴되었다. 용기를 내라... 우리는 반드시 이겨낼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전투 초기 프랑스군은 15만 명이었으나, 4월에는 52만 5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좁은 면적에 집중된 인력이야말로 베르됭이 피바다가 된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세가 저지되자 조프르는 더 공격적인 지휘관을 원했고, 페탱을 중앙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베르됭에는 니벨(Nivelle)을 배치했다.

두오몽 요새 탈환 시도

니벨은 망쟁(Mangin) 장군에게 두오몽 요새 탈환을 명령했다. 전투는 프랑스군의 6일간의 맹포격으로 시작되었다. 5월 22일 보병이 요새에 올라섰지만, 24일에 축출되고 말았다. 그동안 독일군이 경사면에 매달려 있던 304고지를 사수하려던 프랑스군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전장의 핵심인 포병 전력 역시 여전히 독일이 우세하여, 당시 독일군 2,200문 대 프랑스군 1,800문이었다.

베르됭은 마치 촉매제처럼 작동하는 듯했다. 교전국들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이미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른 이 전장에 점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보 본탄의 함락

팔켄하인은 뫼즈 강 우안에서 공세를 재개했다. 6km 전선에서 독일군은 4대 1의 병력 우위를 점하고, 미루어져 왔던 결정적 승리를 위해 만전을 기했다. 두오몽에서 남동쪽 3km 지점에는 보 본탄(Fort de Vaux)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요새는 600명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지만 물, 식량, 포병 지원이 극도로 부족한 상태였다.

6월 1일, 치열한 포격 준비 후 독일 보병이 요새 공격에 나섰고, 6월 2일에는 요새 내부에 진입했다. 그러나 진지를 '소탕'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전투는 통로 하나하나를 두고 벌어졌으며, 수비대를 제압하기 위해 독가스까지 동원되었다. 6월 6일 구원을 시도하던 부대는 궤멸당했고, 마침내 수비대장 레날(Raynal) 소령이 항복했다. 적군은 이 요새 수비대의 용맹함에 대한 예우로, 무기를 든 채 항복할 명예를 허했다.

베르됭 성천 앞에서 좌절하다

독일군은 이제 베르됭 바로 앞까지 다가와 성당 첨탑이 보일 정도였다. 팔켄하인은 승리가 손에 잡힌 듯 확신했다. 6월 18일, 그는 이 일대에 포스겐 가스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7만 명의 독일군은 총을 메고 기다리며 가스가 걷힐 때까지 진격하지 못했다. 이 소중한 시간 동안 프랑스군은 진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6월 23일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군의 진격은 끝내 저지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