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백기의 바다: 1943년 튀니지, 추축군 항복의 순간

백기의 바다: 1943년 튀니지, 추축군 항복의 순간

1943년 5월,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하늘과 땅이 하나로 울리고 있었다. 반년에 걸친 튀니지 전역이 마지막 장면으로 치닫던 이 시기, 연합군의 거센 압박 속에서 추축군의 방어선은 곳곳에서 균열되기 시작했다. 지평선을 뒤덮은 '백기의 바다'는 곧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였다.

세 갈래 포화에 갇힌 적

5월 1일, 제6기갑사단은 구 로멜 군단의 배후에 해당하는 부피샤(Bou-Ficha)에 자리잡고 있었다. 5월 12일, 이 사단은 부피샤에서 남쪽으로 진격하며 그 군대를 역공하기 시작했다. 서부 사막 공군(Western Desert Air Force)의 격렬한 폭격이 지원에 나섰고, 북쪽에서는 사단 포병이 남향해 포문을 열었으며, 남쪽에서는 도시 방어 포병이 북향해 화망을 펼쳤다. 적은 결국 세 갈래의 포화—북쪽의 포격, 남쪽의 포격,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사이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포성이 잦아들 무렵, 사방에 흔들린 백기의 물결은 적 저항의 끝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리비아에서 싸워온 독일·이탈리아 연합군은 오랜 숙적과 마찬가지로, 길고 영광스러웠던 행진의 막을 이 땅에서 내린 것이다.

자그우안 산괴 돌파 작전

해안선을 따라 이러한 사건이 전개되는 동안, 르 쿠퇴르(Le Couteulx) 기갑집단이 선두에 선 오랑(Oran) 사단은 자그우안(Zaghouan) 산괴를 북동쪽에서 우회하여 5월 8일 드피엔(Depienne)에 도달했다. 다음 날 알렉산더(Alexander) 장군은 쾰츠(Koeltz) 장군에게 "자그우안 마을의 틈새를 통해 최대한 강력하고 신속하게 적을 압박하여, 카프본(Cap Bon) 북쪽의 추축군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오랑 사단은 북쪽의 제벨 우스트(Djebel Oust)를 엄호하며 동남동 방향, 즉 자그우안–생트마리듀지트(Sainte-Marie-du-Zit) 도로 축선으로 선회했다. 이 기동은 자그우안 산괴를 북쪽에서 최대한 근접해 포위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야간 역공, 그리고 방어선의 붕괴

그러나 10일, 방어군은 후방에 가해진 직접적인 위협에 대응해 포와 박격포를 북쪽으로 돌렸고, 오랑 사단의 진격은 좌초되었다. 보소(Boissau) 장군은 밤사이 공격 계획을 세워 11일 오전 9시 공격을 개시했고, 마침내 통로를 열어냈다. 정오 무렵에는 자그우안 마을 북쪽에서 2번 국도(튀니스–자그우안선)에 도달했으며, 적의 저항은 완전히 붕괴했다.

기갑집단은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포로의 인파에 휩쓸려 진격조차 더딜 정도였다. 오후 늦게 당글장(d'Anglejean) 대위는 경전차 중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수페르가(Superga)' 사단의 지휘소에 돌진했고, 갈리슈(Galich) 장군은 모든 병력과 함께 항복했다. 오랑 사단장은 "생트마리듀지트–부피샤 추격 축선으로 최대한 신속히 전진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오랑 사단은 5월 11일 저녁 9시 생트마리에 도달했고, 다음 날인 5월 12일 정오 부피샤에서 영국군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산괴 안팎의 항복

한편 산괴 내부에서는, 그때까지 자그우안 봉우리 앞에서 모로코 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던 독일 파이퍼(Pfeiffer) 사단(약 1만 명)이 저항을 멈추고 항복했다. 이 사단은 10일 오후 제벨 레리(Jebel Leri)에서 프랑스군 제9알제리 척후병연대(9e R.T.A.) 부바티에(Bouvattier) 대대의 공격마저 격퇴했지만, 11일 해 질 녘 마트네(Mathenet) 장군 앞에 무기를 내려놓았다.

5월 12일 아침, 제19군단이 확보한 포로는 이미 2만 명, 노획한 화포는 30문에 달했다. 자그우안 요새는 수비병을 모두 잃고 텅 비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튀니지 전역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고, 약 25만 명에 이르는 추축군 병력이 포로가 되면서 북아프리카 전선은 완전히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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