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실리 폴레노프의 《영주의 법》(1874). 결혼 첫날밤을 영주와 보내기 위해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영주 앞으로 끌려가는 젊은 신부.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 소장 • 위키미디어 커먼즈
때때로 어떤 기사나 소설, 영화, 드라마가 '영주의 권리(droit de seigneur)'를 언급하며 온라인에서 큰 화제가 되곤 한다. 이 표현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예속민에게 성적 대우을 강요했던 봉건 영주들을 가리킨다. 성폭력이 역사 전반에 걸친 불행한 상수였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중세에 과연 그러한 '권리'가 제도로서 존재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희미한 증거
'영주의 권리'는 '첫날밤 권리'라고도 불리며, 봉건 영주가 신부의 결혼 첫날밤에 그녀의 처녀성을 빼앗을 권리를 자신에게 귀속시킨 관습을 말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강압도 필요하지 않다. 신부, 신랑, 부모, 친척까지 누구도 이에 반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에 봉건 영주들이 자행한 성폭력 사례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속민의 결혼 첫날밤에 이러한 행위를 허용하는 법이나 관습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놀랄 만큼 희박하다. '영주의 권리'를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많은 중세 문서들은 실제로는 전혀 다른 현상, 즉 농민들이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영주에게 바쳐야 했던 세금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비난 가운데 상당수는 봉건 영주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에서 '영주의 권리'가 처음 언급된 사례로 꼽히는 1247년 몽생미셸 수도원에서 발견된 문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은 농민의 처절한 삶을 읊고 영주에게 바쳐야 할 세금의 긴 목록을 상세히 열거한 시였다. 그중 하나는 농민이 딸의 결혼 허락을 받으려면 영주에게 돈을 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딸이 영주에게 강간당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시는 세속 봉건 영주들의 야만성과 폭정을 고발하는 글로 읽힐 수 있지만, 실은 풍자시다. 저자인 수도원의 수사들은 이웃 봉건 영주들의 영토에 살던 농민들을 자신들의 영지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 시를 집필했다. 스스로가 더 공정한 주인이라고 선전함으로써, 농민들에게 자신들의 영지에서 일하는 편이 이익이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영주의 권리'의 존재를 입증한다는 증거 역시 신뢰하기 어렵다. 알폰소 10세 통치기의 두 법전 《푸에로 레알(Fuero Real)》과 《라스 파르티다스(Las Partidas)》에 담긴 법조항들이 오해석된 대표적 사례다. 이 조항들은 서로 다른 상황을 규정하는데, 예컨대 그중 하나는 결혼식 날 신랑이나 신부를 모욕한 자에 대한 처벌을 정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욕'은 욕설과 같은 언어적 공격을 의미할 뿐이다.
분노한 농민들
중세 스페인에서 '영주의 권리'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꼽히는 것은 1486년의 칙령 《과달루페 중재 판결(Sentencia arbitral de Guadalupe)》이다. 이 칙령에서 카탈루냐의 영주들과 그들의 예속민인 레멘사(remensa) 농민들은 오랜 봉기 끝에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 이 문서에서 영주들이 가신들에게 부과하던 세금의 '남용'들이 폐지되는데, 특히 "농민이 아내를 맞이하는 첫날밤에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할" 권리를 영주에게 허락하던 조항들이 그렇다.
비록 문구의 의미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더라도, 실상은 훨씬 복잡하다. 그보다 몇 년 전인 1462년, 레멘사들이 평화 협정 초안에서 이 '남용'의 폐지를 요구했을 때("일부 영주들은 농민이 아내를 맞으면 영주가 첫날밤에 그녀와 잠자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봉건 영주들은 그런 일을 요구하는 자를 본 적이 없으며, 만약 입증된다면 폐지에 동의하겠다고 받아적었다. 우리는 자신들도 잘 알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하는 이 영주들의 냉소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는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영주권에 대한 농민들의 주장의 또 다른 사례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명확한 문서 증거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주의 권리'는 최소한 제도나 사회적 관습으로서는 신화라 추론할 수 있다.
만일 이 첫날밤 권리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방대한 기록 보관소를 갖춘 아라곤 왕국에서 이 권리를 언급하는 다른 문서가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레멘사들은 소문을 진실로 믿었고, 영주들이 이 학대를 일반화하려 들지 않을까 두려워했을 수 있다. 명확한 문서 증거의 부재를 종합하면, '영주의 권리'는 최소한 제도나 사회적 관습으로서는 신화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반면 이것이 오늘날의 도시 전설처럼 중세 사람들의 의식 속에 허구적 형태로 존재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정치적 소문
'영주의 권리'의 역사는 적어도 13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봉건 영주를 공격하는 정치적 무기로 유통되어 왔다. 16~17세기에는 법학자들이 이를 활용해 왕권의 이익을 위해 영주의 이미지를 깎아내렸다. 대표적으로 에스피 리플레시에(Esprit Fléchier)는 1665년 오베르뉴 농민들의 불만을 전하며 자신의 회고록에 '영주의 권리'에 관한 소문을 기록했다. "오베르뉴에는 결혼의 권리라 불리는 꽤 흔한 법이 있습니다. 이 권리는 그 기원에 있어 영주에게 신부의 침대에 들 설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주장에 대해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자 '영주의 권리'는 봉건주의와 폭정 비판의 상식적 소재가 되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는 '선취(prelibation)' 항목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십자군 이전과 십자군 시대에 영주들이 스스로 차지한 권리로, 평민 예속민인 새 신부와 첫날밤을 보내는 권리였다. […] 지난세기에 어떤 영주들은 신민들에게 이 기괴한 권리의 포기를 대가로 돈을 받기도 했다. 이 권리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거의 모든 지방에서 오랫동안 통용되었다."
19세기에도 이 관습의 실재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었다. 반성직자 성향의 학자들은 그 존재를 확인해 주는 문서를 찾아 나섰고, 성직자 편에 선 이들은 그것이 날조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신화가 오늘날까지 이토록 오래 생명력을 유지해 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중세를 잔혹하고 어두운 시대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 더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더 읽을 거리
알랭 부로(Alain Boureau), 《쿠사주의 권리—하나의 신화의 탄생, 13~20세기》, 알빈 미셸, 1995.
모차르트는 음악으로 분노하다
보마르셰의 동명 희곡에서 영감을 얻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는 결혼을 앞둔 하녀 수잔나를 유혹하기로 결심한 귀족, 알마비바 백작이 등장한다. 그녀의 약혼자 피가로는 자신이 봉건적 학대라고 여기는 행위에 맞서며, 1막에서 수잔나는 피가로에게 백작이 자신의 호의와 맞바꿔 지참금을 약속했다고 털어놓는다.
수잔나: "그는 [그 지참금을] 내게서 영주의 권리에 해당하는 어느 반 시간을 얻기 위해 준답니다."
피가로: "뭐라고요? 백작께서 자신의 영지에서 이 권리를 폐지하지 않으셨습니까?"
수잔나: "그렇긴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고 계세요! 그리고 그 권리를 저에게 다시 적용하려 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