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방 차단, 고립된 제6군
소련군의 대규모 포위 기동(우라누스 작전)으로 후방 보급선이 완전히 끊긴 독일군은 오직 자신들의 힘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곧이어 이어진 타친스카야와 모로좁스카야 비행장의 상실이었다.
독일 공군은 효과적인 공중 보급 작전을 조직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포위된 병력에게 식량, 탄약, 증원 병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여기에 붉은 군대가 가해지는 압박까지 겹치면서 독일군의 상황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원 시도의 실패와 파울루스의 선택
국방군 사령부가 파울루스의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파견한 폰 만슈타인 지휘하의 기갑 부대는 붉은 군대에 의해 저지되고 격퇴되었다. 특히 파울루스가 명령을 거부하고 포위망 돌파 시도에 나서지 않으면서 구원 작전은 완전히 좌절되었고, 이 실패는 포위된 부대의 운명을 사실상 확정지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원수(元帥) 칭호를 수여했다. 그 목적은 그의 부하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용기를 다해 저항하도록 부추기기 위함이었는데, 당시까지 이 높은 영예를 받은 장성이 적에게 생포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원수가 된 이상 파울루스는 항복하는 대신 죽음을 택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였던 것이다.
히틀러는 이러한 희생을 정당화하며, 제6군이 러시아군 7개 개별 군단을 스탈린그라드에 묶어두는 동안 자신은 다른 전선에서 자유롭게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제6군의 병사들은 반드시 전투 중에 죽어야 했다. 더욱이 소련군은 학살을 자행하며 진격해 온 나치 점령자들에 대한 깊은 증오를 품고 있었기에, 살아남은 포로들을 기다리는 포로 생활의 조건 또한 극도로 참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포로들의 비참한 최후
실제로 91,000명의 포로 중 무려 8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원인은 직접적인 학대보다는, 마지막 절망적인 전투 기간 동안 혹한에 장기간 노출되고 극심한 결핍을 겪으며 몸이 바닥나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포위망 분할과 독일군의 항복
소련 노농적군(RKKA)은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부대를 각개격파하기 시작했다. 지하실에 숨어 있던 파울루스와 그의 참모진이 소련군에게 발각되면서 독일군의 항복은 더욱 빨라졌다.
결국 1943년 1월 31일 남부 지역의 독일군이 먼저 항복했고, 1943년 2월 2일에는 북부 지역의 잔여 병력마저 항복하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막이 내렸다. 파울루스는 직접 자신의 부대에 항복을 명령했고, 이로써 동부 전선 최대의 참패가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