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항공사에 이토록 강렬한 흔적을 남긴 조종사는 드뭅니다. 한나 라이치(Hanna Reitsch, 1912~1979)는 40개가 넘는 세계 비행 기록을 보유한 글라이더 명인이자,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시험 조종사로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남다른 비행 실력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나치당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오늘날까지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 한나 라이치
의대생에서 글라이더 강사로
그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를린 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했지만, 곧 학업을 접고 평생의 열정이었던 비행에 전념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는 군용기 제작이 통제되는 등 엄격한 항공 제한이 부과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글라이더(활공기) 조종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후 글라이딩 강사 자격을 취득했고, 일부 영화의 고난도 비행 장면을 대역으로 맡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들과 같은 비행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던 그녀는 스스로 한계에 도전하며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고도와 속도 부문에서 아직까지 어떤 여성도 따라잡지 못한 40개가 넘는 세계 기록을 세웠습니다.
'나치 발명품'의 시험 조종사
고위 나치 지도자들과의 우정, 그리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대담함 덕분에 그녀는 당대 최첨단 항공기, 이른바 '나치 발명품'들의 시험 조종사로 발탁되었습니다.
- 포케불프 Fw 61: 실험용 헬리콥터. 스페인 출신 엔지니어 후안 데 라 시에르바(Juan de la Cierva)가 설계한 오토자이로를 복엽기에 응용해 제작했습니다. 한나 라이치는 1938년 베를린 모터쇼에서 이 기체의 시범 비행을 여러 차례 선보였습니다.

- 메서슈미트 Me 163 코메트(Komet): 세계 최초의 제트기로, 훗날 메서슈미트 Me 262로 대체될 예정이었습니다.

- 셀프오퍼(Selbstopfer) 항공기: 독일의 자살 공격기. 그녀는 일본판(요코스카 MXY-7)을 통해 이 프로토타입의 개발에 참여했지만, 히틀러는 결국 이 프로젝트를 폐기했습니다.

두 개의 영예로운 훈장
그녀는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이 훈장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자, 단 두 명뿐인 여성 수훈자 중 한 명입니다. 또한 다이아몬드 장식 금색 항공 훈장을 받은 나치 정부 유일의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전후의 삶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녀는 인도와 가나에 글라이더 비행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을 감독했으며, 여러 권의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미국 실험 항공기 협회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971년에는 '올해의 조종사'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