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총사령관'으로 추대되다
1936년 9월 28일, 바렐라(Varela) 장군은 하루 전 알카사르의 포위를 성공적으로 해제한 뒤 톨레도 시내로 입성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10월 1일, 정치적 성격을 띤 중대한 사건이 프랑코의 승세를 굳혔다. 그는 '총사령관(Generalísimo)'으로 추대되었고, 충성파들이 내건 '운명의 인물'이라는 예언은 현실에서 기묘한 확증을 얻었다.
당시 프랑코를 제치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인물들은 더 이상 없었다. 칼보 소텔로(Calvo Sotelo)는 암살되었고,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José Antonio Primo de Rivera)는 공화정부의 감옥에 갇혔으며, 고데드(Goded)는 총살되었고, 스페인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산후르호(Sanjurjo)는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권력 앞에 남은 것은 오직 프랑코뿐이었다. 부르고스(Burgos)의 군사정부는 그를 '스페인 정부 최고 수반'으로 임명했다. 국내에서 전쟁이 시작된 지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이미 권력의 정상에 올라섰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한 유럽 국가지도자로서는 가장 길다고 할 만한 집권 여정이 이렇게 막을 올린 것이다.
수도를 향해 짓달리는 두 개의 부대
국민파의 톨레도 함락은 곧바로 마드리드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바렐라와 야구에(Yagüe)가 지휘하는 총 2만 명 규모의 두 개 부대가 수도를 향해 협공을 개시했다. 10월 17일에는 국민파 선봉대가 마드리드에서 35km 지점까지 육박했고, 11월 5일에는 시내 전차 노선의 종점이던 알코르콘(Alcorcón)과 레가네스(Leganés) 등 근교 지역에까지 도달했다.
그다음 날인 11월 6일, 라르고 카바예로(Largo Caballero) 정부는 문서 보관함들을 트럭에 싣고 발렌시아로 정부 기능을 옮기며, 도시 방위권한을 마드리드 수비사령관 호세 미아하 메난트(José Miaja Menant) 장군에게 위임했다. 이튿날인 11월 7일, 바렐라가 총공세에 나섰다.
노 파사란! 절대 통과시키지 않으리라
세 방면에서 포위당하고, 정부에게 버려지고, 정치적 분열에 시달리던 마드리드의 함락은 불가피해 보였다. 국민파는 함락을 '몇 시간 문제'로 여겼다. 세 갈래의 공격이 동시에 개시되었는데, 서쪽에서 진입한 첫 번째 공격은 격전 끝에 대학 도시(시우다드 우니베르시타리아)에서 저지되었다. 건물 한 층의 점유를 두고 백병전이 벌어졌고, 포병과 항공기는 교전 중인 양측 머리 위로 수많은 폭탄을 퍼부었다. 독일 병사들의 욕설이 프랑스 의용병들의 외침과 뒤섞여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위기에 몰린 공화국의 구호는 모든 이의 가슴을 울렸다. "¡No pasarán!(절대 통과시키지 않으리라!)" 이렇게 해서 '마드리드 공방전'이 시작되었고, 공화파는 그 첫 국면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물론 이 치열한 전투에서 외국의 지원 또한 큰 몫을 했다. 한쪽에는 독일·이탈리아의 전투기와 전차가, 반대편에는 소련의 전차와 항공기, 그리고 국제여단 병력이 참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드리드의 저항은 무엇보다도 시민들 자신의 것이었다. 민병대원들의 뜨거운 열정에 끊임없이 고무된 주민들은, 약 130년 전 사라고사 공성전의 아구스티나처럼 '파시오나리아(Pasionaria)'로 불린 돌로레스 이바루리의 투쟁 독려 속에 일어섰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참호를 파고 바리케이드를 쌓았으며, 직접 총을 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1월 23일,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지칠 대로 지친 양측은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며 재정비에 들어갔다. 마드리드는 함락되지 않았지만, 적은 여전히 성문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