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25일, 국제적으로 명성 높던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일본 사회의 타락에 항의하는 뜻으로 공개적으로 할복(切腹) 자살을 감행했습니다. 이 의식적 자살은 일본과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습니다. 나라는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눈부신 물질적 번영 이면에 고대 사무라이의 엄격한 가치관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미시마의 피는 한 세대 일본인에게 던진 비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사무라이는 누구였는가
그렇다면 한 민족의 성격을 빚어낸 이 긍지 높은 전사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수세기 동안 일본 사회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충성 관계로 맺어진 지방 호족들의 연합체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기원후 300년경부터 국가는 천황 아래 통일되었지만, 황실의 권위는 여전히 미약했습니다. 실제로 상당수 천황은 권력을 다투던 귀족 출신 무사들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좌우되곤 했습니다. 10세기에 이르러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정치 실권을 장악하면서 천황은 이 강력한 가문의 손바닥 위에서 굴러가는 장난감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무사 계급의 부상
후지와라 시대에 일본 귀족들은 도시와 교토의 황궁에 모여 살았고, 그 결과 지방에는 권력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이 틈새는 새로운 호족들이 채워나갔는데, 이들은 중세 유럽의 제후들처럼 사병(私兵)을 거느렸습니다. 이 전사들을 '부시(武士)'라고 불렀으며, 훗날에는 '사무라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무라이'는 '섬기는 자'라는 뜻을 지닌 중국어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처음에 사무라이는 '후지와라의 이빨과 발톱'에 지나지 않았지만, 점차 무력으로 권력을 쟁취해 나갔고, 마침내 1156년 최고 명문 무사 가문 중 하나가 황실을 분열시키던 분쟁을 틈타 후지와라 가문을 밀어냅니다. 이후 약 700년 동안 일본의 역사는 완전히 무사 계급이 지배하게 됩니다.
절대적 충성의 이념
절대적 충성이라는 개념은 사무라이 전통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름난 기사든 무명의 용병이든, 명실상부한 전사라면 주군에 대한 서약에 구속되었습니다. 호족들 역시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비록 군주가 궁정에 은둔한 채 무력화되어 살아간다 해도, 그의 칭호와 신성한 혈통은 여전히 숭앙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종은 절대적 이념이었습니다. 어떤 사무라이도 명령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고, 잠시 생각할 겨를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젊은 전사들은 자신의 목숨이 온전히 주인의 것이며, 주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주인이 전장에서 또는 침상에서 죽으면, 그 수행원들은 때때로 저승까지 함께 가야 한다고 여겨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습니다. 일본 연극의 고전 『추싱구라(忠臣蔵)』는 1703년 47명의 사무라이가 주군 없이 남는 것보다 차라리 할복을 택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할복의 의미와 규칙
'하라키리(腹切り)'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배를 가르다'라는 뜻이며, 이 형태의 자살은 전사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여성은 목을 열거나, 상인은 독약으로 스스로를 끝냈습니다). 배는 인간의 정수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훼손은 매우 정교한 규칙에 따랐습니다. 예컨대 칼로 베는 상처는 반드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하게 내야 했고, 치명타는 수직 방향으로 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만으로 확실한 죽음에 이르기 어려웠기 때문에 결국 참수가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사무라이는 수치를 피하기 위해, 주군에 대한 헌신을 보이기 위해, 혹은 미시마처럼 항의의 표시로 할복을 행했습니다. 전장에서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자결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사무라이에게 항복의 굴욕보다는 죽음이 더 나았기 때문입니다.
폭력과 선(禪)의 양면
사무라이가 강대해지기 전, 우아한 궁정 귀족들은 그들을 산적이자 야만인으로 여겼습니다. 훗날에는 어떤 사무라이들이 신과 같은 영웅으로 대접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이미지 모두 완전히 진실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오만하고 무법한 사무라이들, 특히 긴 평화의 시기에는 사회에 골칫거리가 되곤 했습니다. 그들은 상업을 멸시하는, 완전히 비생산적인 특권 계급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유통되던 화폐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 무사의 교양 있는 태도로 여겨졌습니다. 만약 상인이 사무라이가 건넨 화폐를 의심하는 눈치를 보였다면, 무사가 그 자리에서 그를 베어 죽이는 것이 완전히 합법이었습니다. 아무도 이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경계심 없는 평민이, 단지 '손놀림을 시험해 보고 싶은' 사무라이의 칼에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슬픈 경고의 외침 하나와 함께 칼끝은 번개처럼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사무라이의 도(道)가 폭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사의 삶은 도덕적 완성을 향한 느린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사무라이들은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는 선불교(禪佛敎)의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전사들이 단순한 것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고요한 의식인 유명한 다도(茶道)를 널리 알린 인물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선 종교가 추구하는 순수함과 간소함에 대한 관심이 이 거친 전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라이의 무기
얼마나 금욕적이고 고귀했든, 사무라이는 무엇보다 전쟁의 기계였습니다. 그의 애장 무기는 칼 두 자루, 즉 긴 칼과 짧은 칼로, 모두 면도날처럼 날카로웠습니다. 높은 지위의 기병들은 활과 화살로도 무장했으며, 하급 사무라이들은 주로 창으로 싸웠습니다.
쇠퇴와 불멸의 유산
1600년경 사무라이 계급은 인구의 약 6%를 차지했고, 초기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용맹한 병사라 해도 더 이상 군 계급의 서열을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계급 구조가 훨씬 경직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치와 부패 역시 무사 전통을 서서히 타락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사무라이 가문들은 메이지 천황(1867~1912)의 통치 때까지 국가의 삶을 계속 지배했습니다. 위대한 개혁가였던 메이지 천황은 황실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일본을 하룻밤 사이에 국제적 강국으로 변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사무라이의 전통은 군사적·문화적 삶 속에 살아남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 장교들은 항복 대신 할복을 택했고, 자살 특공대원들은 미국 함선 대열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습니다.
1970년 미시마의 자살 4년 뒤인 1974년, 똑같이 섬뜩한 사건이 이어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황군 중위였던 히로오 온다(小野田寛郎)는 52세의 나이로 필리핀 한 섬의 정글에서 모습을 드러내, 전쟁이 끝난 지 29년 만에 마침내 검을 놓고 항복했습니다. 그는 1944년 그 섬에 부임한 뒤 항복하라는 직접 명령을 받지 못했다며, 깊은 정글 속에 숨어 계속 전투를 이어왔습니다. 온다는 옛 상관(서점을 운영하다 은퇴한)이 직접 비행기를 타고 찾아와 휴전 명령을 내렸을 때에야 비로소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이 긴 비극을 이끈 것은 두려움도 기벽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무라이의 용기와 충성의 정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