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947년 카슈미르 부족 침략: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서막

1947년 카슈미르 부족 침략: 인도·파키스탄 분쟁의 서막

힌두 왕과 무슬림 다수, 독특한 지위의 카슈미르

카슈미르는 당시 인도 내에서 유일하게 통치자인 마하라자는 힌두교도였지만 주민 대다수는 무슬림이었던 번왕국이었다. 래드클리프 경이 그린 인도 분할 지도에 따르면 카슈미르에는 인도에 합류하거나 파키스탄에 합류할 선택권이 주어졌고, 양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완전히 독립적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인도가 독립한 후 카슈미르의 마하라자 하리 싱은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와 거리를 두고 독립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파키스탄이 카슈미르에 대해 자연스러운 권리가 있다고 여겼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진나가 카슈미르를 주장한 세 가지 이유

(1) 파키스탄과 카슈미르의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었다.
(2) 카슈미르는 힌두교도보다 무슬림 인구가 많았다.
(3) 카슈미르에서 발원하는 몇몇 강은 인도 영토를 잠시 흐른 뒤 파키스탄으로 흘러들었으며, 이 강들은 곧 파키스탄의 생명선이 될 것이었다.

1947년 10월 22일, 부족민들의 침공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를 얻지 못한 채 국왕이 양국 모두와의 합류를 거부하자, 1947년 10월 22일 파키스탄은 파슈툰 부족민들을 앞세워 카슈미르를 침공했다. 이들 부족민과 함께 파키스탄 정규군도 파견되었다. 이 군대는 바라물라에 도달해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했고, 마하라자 하리 싱은 인도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사르다르 파텔은 카슈미르를 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지만, 네루와 마운트배튼은 "카슈미르 국왕이 인도 합류 의사를 표명하기 전까지는 인도군을 파견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 이에 파텔은 국방장관 발데브 싱의 협조를 얻어, 스리나가르와 바라물라 고개를 지키기 위해 즉시 전선으로 투입될 수 있도록 카슈미르 국경 인근 인도 영토에 보안 부대를 배치했다. 아울러 스리나가르에서 파탄코트까지 이어지는 도로 건설도 추진했다.

침략군이 스리나가르에서 불과 35km 지점까지 접근했을 때, 하리 싱은 마침내 인도에 대한 가류 문서(Instrument of Accession)에 서명했다.

인도군 투입과 유엔 회부

이제 네루와 마운트배튼은 인도군을 카슈미르에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마운트배튼은 카슈미르가 무슬림 다수 지역이며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이유로 파키스탄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사르다르 파텔은 카슈미르가 수백 년간 힌두 왕의 나라였다는 점에서 인도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운트배튼은 네루에게 이 문제를 유엔에 회부할 것을 권했다.

사르다르 파텔은 이 안건에 반대했지만 네루는 마운트배튼의 의견을 따랐다. 마운트배튼과 네루는 주나가드(Junagadh) 문제 역시 유엔에 가져가려 했으나, 그곳에서도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과 발데브 싱이 군사적 조치를 통해 주나가드를 지켜냈다. 카슈미르에서도 비슷한 판단이 내려졌다.

부총리로서 사르다르 파텔은 국방장관 발데브 싱과 논의한 끝에 인도군을 펀자브의 구르다스푸르를 경유해 카슈미르에 진입시켰고, 인도 공군기는 스리나가르에 착륙했다. 한편 네루는 마운트배튼의 조언에 따라 이 문제를 유엔에 회부했다. 1948년 1월 1일, 인도는 안전보장이사회에 "인도의 일부인 카슈미르가 무장 부족민들에게 침략당했으며, 파키스탄이 이들에게 직접적·간접적으로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또한 "이 침략은 국제 평화와 질서를 위협한다. 따라서 파키스탄에게 군대를 철수하고 부족민들에 대한 군사적 원조를 중단하도록 요구해야 하며, 파키스탄의 이러한 행위는 인도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8년 1월 15일, 파키스탄은 인도의 주장을 기각하고 오히려 인도를 비난하며, 잠무·카슈미르의 인도 편입은 위헌이며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개국 위원회를 구성하고, 현지 상황을 관찰하며 타협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휴전과 좌초된 주민투표

유엔 위원단은 카슈미르에 들어가 현지를 시찰했고, 1948년 8월 13일 전쟁을 멈추고 타협하기 위한 여러 건의 제안을 양측에 제시했으며, 이를 놓고 오랜 협상이 이어졌다. 마침내 1949년 1월 1일 양측은 휴전에 합의했다. 최종 귀속은 주민투표(플레비사이트)를 통해 결정하기로도 합의되었다. 이를 위해 미국인 체스터 니미츠(Chester Nimitz)가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파키스탄이 합의 조건을 이행하지 않아 주민투표는 끝내 실시되지 못했다.

니미츠는 결국 직을 사임했다. 네루와 마운트배튼은 카슈미르 문제를 유엔에 회부함으로써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사르다르 파텔은 자와할랄 네루에게 크게 분노했다. 네루의 잘못된 정책 탓에 1962년에는 중국까지 카슈미르의 광대한 지역을 강탈했으며, 그 지역은 지금도 중국의 지배 아래 있다. 1965년에는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다시 한번 전쟁을 벌였고, 파키스탄은 카슈미르의 상당 부분을 점령해 지금도 그 지배 아래 두고 있다.

분할 자산과 군수물자 이송 분쟁

카슈미르에서 파키스탄이 선동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인도 정부는 분할 당시 합의된 자산의 파키스탄 이전을 중단했다. 영국령 인도 재산의 17.5%가 파키스탄에 지급될 예정이었는데, 현금은 인도 준비은행(RBI)이 관리했으며, 은행은 7억 5천만 루피(75 crore)에 달하는 이체를 수개월간 동결했다. 간디의 압력에 못 이겨 네루 정부는 결국 파키스탄에 5억 5천만 루피(55 crore)를 지급해야 했다.

파키스탄은 총검의 힘으로 차지하려 했던 강은 결국 얻지 못했지만, 카슈미르 전쟁의 여파로 파키스탄 몫으로 배정된 무기·탄약 등 방위 물자 16만 5천 톤이 인도 내에 묶이게 되었다. 이 중 인도는 1948년 3월 31일까지 겨우 4,730톤을 인도했고, 이후 같은 해 9월 10일까지 1만 8천 톤을 추가로 넘겨주었을 뿐이다. 파키스탄은 이 시점까지 인도가 파키스탄 몫의 군수물자 14만 2천 톤을 미지급 상태로 남겨두고 있다고 주장했다.